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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r 18. 2020

무엇이 되려고

나는 원래 무엇이 되려고 했던가

연기를 시작하고 대학에 갔을 때엔 연기를 잘하는 4학년 선배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연기를 잘하던 선배들은 대개 잘 생기지도 않았고 키가 크지도 않았지만 대학생이라고 하기엔 수준 높은 연기를 보여줬다(당시 신입생인 내 눈엔 적어도 그랬다).


그때 당시만 해도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최고의 배우라고, 빼어난 외모나 잡기는 잠깐이지만 뛰어난 연기력은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주니 연기에 몰두하라는 조언을 듣고 연기에 매진할 수 있었다.


졸업 후 독립영화 판에 뛰어들었을 때도 변함이 없었다. 대신 나는 흔히 말하는 ‘대극장형 연기’(큰 무대에서 많은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동선이나 동작, 표정과 소리를 확장해서 표현해야 하는 연기라고 설명하면 적당할까)를 싫어하는 감독들을 만나며 코 앞에 있는 카메라를 벗어나거나 이마 위에서 달랑거리는 마이크가 대사를 칠수록 점점 멀어지지 않게 힘을 빼는 데 열중해야 했다.


어느 날은 연극 <에쿠우스>의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한 번에 다섯 명이 같이 들어가 순서대로 준비한 독백을 해야 했다. 돌아가며 소개를 하는데, 의도치 않게 서울에 내로라하는 연극과 출신 다섯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심사를 하시는 분이 “각 학교의 대표라고 생각하고 한 번 열심히 해봐요.”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나는 땀에 손이 젖은 채로 연기했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준비한 것들을 끝까지, 온 힘을 다해 연기하고 나왔다. 하지만 오디션장에서 나와 떠오른 건 수고했다는 심사위원들의 말들이 아니라,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네 명의 배우였다.


충격에 휩싸인 나는 한참을 걸었다. 세상은 넓고, 비슷한 나이를 지닌 배우들 중에도 이렇게 뛰어난 경쟁자들이 많구나. 심지어 이 사람들 중에서도 한 명이나 붙으면 다행이겠지.


그 날 이후로 연극 오디션도 더 자주 보고 뮤지컬 오디션도 보며 자주 나를 점검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곤 했다.


그래. 좋은 배우가 되어야지, 잘하는 배우가 되어야지.


그렇게 또 몇 년을 오디션을 보고, 떨어지고, 영화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인지도가 생기면 좀 나아질까 억지로 해시태그를 붙여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늘려가며, 유튜버를 해볼까, 가벼운 이미지가 생기진 않을까, 매일매일 하는 아르바이트는 내 시간과 체력을 자꾸 빼앗아가는데, 돈은 어디서 벌어야 연기하는데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역할을 얻고, 잘 될 수 있을까, ‘다 때가 있다’라는 선배들의 막연한 조언에서 벗어나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같은 종류의 고민들이 아직도 내 주변에 맴돈다.


동료들이나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걔도 뮤지컬 하던 앤데 드라마 나와서  됐잖아.”라는 , “연극만 했을 때는 손가락 빨던 애가 드라마 나와서 성공했지.”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하는  제일 좋을까 고민하다 “원래 공연 쪽에선 알아줬어요라고 답하고 만다.


배우에게 ‘잘 됐다’, ‘성공했다’라는 말은 어디에 편중된 걸까. 연극이나 뮤지컬을 하는 배우는 아직 성공하지 못한 배우가 되는 걸까.


한 선배는 드라마와 뮤지컬 스케줄이 겹쳤을 때, 드라마 쪽에서 당연히 뮤지컬 스케줄을 변경해야 하는 것처럼 말해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나 또한 가리지 않고 영화, 드라마, 연극, 나아가 뮤지컬도 해보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유명해지는 일도 좋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불림받아 자주 캐스팅되고, 티켓파워가 생기고, 페이가 높아져 돈도 많이 벌고, 나아가 내가 작품을 고를 수 있는 입장이 된다면 배우로서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이따금씩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짚어보는 시간이 오면 혼란스럽기도 하다.


내가 존경하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 서 있을 때의 모습은 더 이상 존경스럽지 않아 지는 건가. 그들이 천만 영화와 시청률을 자랑하는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해야 명품 배우가 되는 걸까.


그래서 더 그런 건지, 원래 무대에서 기량을 뽐내셨던 분들이 매체에서 주조연으로 활동을 하다 중간중간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다.


무언가를 비난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배우라는 존재는 관객들 앞에 서야 하기에, 잘할수록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마땅한데, 세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으니 가능성을 열어둔답시고 이것저것 다 손을 뻗어보고 있는 나에 대한 반성문에 가깝다.


열일곱 살, 그때 내가 하려던 배우는 우주 어디 즈음에 닿아있을까.


-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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