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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Apr 19. 2020

재능 없는 사람들

재능이 없다고 꿈도 꿀 수 없는 건 아니라서

지인의 부탁으로 입시학원에 특강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성공한 배우도 아닌데 내가 가서 무슨 얘길 하겠느냐 거절했지만, 오히려 좋다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찾아간 학원 강의실에 내가 들어서자 누구인지 모르는 학생들은 어리둥절했고, 내 소개에 학생들 박수소리가 시원치 않자 선생님은 몇 초 나오지도 않은 유명한 상업영화나 드라마 제목을 대어 가며 나를 띄워주었다.


입시하느라 고생이 많다는 나의 심심한 위로로 시작된 특강에서 나는 어설픈 꼰대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말하기보다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학생들은 입시 생활은 어땠나, 대학생활은 어땠나, 자유연기는 얼마나 준비했나 같은 질문을 몇 개 던지다가, 저 끝에서 장난기 있어 보이는 학생 하나가 ‘연예인 누구랑 친하냐’라는 질문을 던지자 양옆에서 ‘누구누구 봤냐’, ‘실물이 어떠냐’ 등 실제로 궁금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곤란한 질문은 대충 얼버무리고는 친한 연예인이나 배우들도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도 독립영화나 공연을 하다가 좋은 드라마나 영화를 만나서 멋지게 기량을 뽐내고 있다, 나도 곧 그렇게 될 날을 상상하며 하루하루 훈련하고 여러모로 노력하며 살고 있다, 아마 여러분이 성장해서는 더 다양한 길이 열려 있을 것 같은데 중간에 나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되는 사람은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나아갔으면 좋겠다, 나도 그 앞에 서서 여러분에게 희망이 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 같은 말로 마무리 지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을 받는다고 하자 다들 쭈뼛쭈뼛하기에 끝내고 일어나려는데, 한 학생이 ‘저...’라는 말을 먼저 뱉더니 내가 쳐다보자 손을 반쯤 들고는 “연기하신 지 10년이 넘었다고 하셨는데,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지 궁금해요.”라고 질문을 했다.


학생들이 속으로 내가 힘들 거라고 어림짐작 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나는 머릿속에서 잠시 할 말을 정리한 뒤 덤덤하게 대답해주었다.


“일단,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연기 그만 둘 바엔 죽어버리겠다고 하는 외골수도 아닙니다. 아마 그만 두면 뭐든 표현하는 일 중에 잘할 수 있고, 재미를 느끼는 일을 찾아서 하고 살겠죠... 힘이 드는 순간은 많습니다. 금전적으로 시달려서 원하지 않는 일로 돈을 벌어야 할 때, 주변 동료들이 앞으로 치고 나가서 나만 뒤쳐지는 것 같아 절망감이 들 때, 작품을 한 지 오래돼서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갈 때,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겨내기 어렵고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부분은, 주변의 기대와 내 목표에 성과가 못 미치는 같아서 자기 스스로를 압박할 때가 가장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정작 연기가 잘 안 풀려서 고통받는 것보다 그 외적인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곤 하죠... 저는 신인배우라는 말을 쓴 지 6년 정도 됐는데, 이 ‘신인배우’라는 말이 꽤나 효과적입니다. 그간의 부족한 커리어나 감독님이 보기엔 못 마땅한 실력도 이 말 하나면 조금 용서가 되거든요. 아마 사람들이 알아볼 대표작이 몇 편 생기기 전까진 이 말을 계속 쓰게 될 것 같은데, 신인이라고 생각하면 시작 단계니까 꾸준히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겸손하고, 성공한 상태가 아니어도 실망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은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지금만큼 꾸준히 하면 금방 좋은 배우가 될지도 몰라요. 저는 평생을 돌아봐도 입시 때만큼 열심히 한 시절을 찾아볼 수가 없거든요. 존경합니다. 입시 파이팅”


집으로 돌아와 학생들과의 대화를 되짚어보니 놀고, 먹고, 자고, 싸는 일 외에 10년을 넘게 꾸준히, 그것도 다른 일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필사의 노력을 해온 일이라고는 연기밖에 없으니 연기를 안 해도 죽진 않지만 근 10년간 연기 없이 살아본 적은 없는 것이었다.


이 삶, 저 삶을 살아보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데 단편적으로나마 여러 인생을 경험하게 해 줘서, 무엇이든 익혀놓으면 쓸 데가 있는 직업인지라 공부에 끝이 없어서, 다른 이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려보는 시간을 갖게 해 줘서, 어떤 생각과 감정에 깊이 있게 파고들어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줘서, 지치고 지겨울 만큼의 생활에도 좋은 영화 한 편이면 가슴이 뛰게 해주는 이 일이, 뭐 하나 일등이라곤 해본 적 없지만 뭘 하든 평균은 가던 나에게 안성맞춤이라고 느껴졌던 이 일이, 무엇보다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표현하게 해 줘서 감사한 이 일이, 별다른 재능 없는 내 앞에 나타나 주고 곁에 있어줘서 고마운 마음이 드는 날.

-2018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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