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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창의력을 탈환하다

by 주모운

아이를 키우다 보니 옳다와 그르다에 대해 말하는 일이 조심스럽다. 아이에게는 처음 해보는 행동이 많다. 처음 본 사물, 처음 본 광경, 처음 겪어보는 상황들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다. 아이는 짧은 인생 동안 겪은 정보와 의식의 흐름을 지나치는 창의력을 기반으로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판단한다. 길에서 주운 나뭇가지를 휘두를 수도 있고 무언가 찔러볼 수도 있다. 혹은 두 개를 잡아 젓가락처럼 무언가를 잡아볼 수도 있다. 땅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의 용도가 무엇인지 정답이 없으니 나는 그저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다칠 수 있으니 함부로 휘두르지 말라는 말과 제자리에 가져다 두라는 말을 한다.


아이 나름대로 꼬리와 주둥이처럼 보이는 부분을 톡 튀어나오게 쌓은 블록이 공룡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진 나는 그것이 공룡인지 알 턱이 없다. 아이가 여태 본 공룡의 모양새가 가지각색이며 어떤 공룡을 형상화한 것인지 이름조차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럴 때면 잘했다고 칭찬해 준 뒤 다른 공룡도 있냐 묻는다. 아이는 또 무언가를 마음속에 그린 듯 다른 형태의 공룡을 만든다. 어떤 형태가 됐든 그것이 아이에겐 공룡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놔두면 다칠 수 있는 일,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만한 일 외에는 되도록 '잘못했다, 틀렸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성장하면서 들었던 수많은 '틀렸다'는 말로 인해 창의력을 잃어버렸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어른이 되었다. 남들이 하는 평균적인 행동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딱히 문제 삼을 일이 없어 편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아갈 때마다 눈에 띄는 일도 없었다. 개성을 상실한 개인은 군중의 일부에 불과했다.


배우로서 작품의 계획에 맞춰 능수능란하게 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함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이기 때문에 섭외할 이유가 없어진다면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대체 가능한 쓸모로 존재한다면 결국엔 품질과 내구성, 가격 면에서 계속 뒤처지게 될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대체 인재가 계속 발생할 테고 무한한 경쟁만이 미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배우로서의 창의력이란 개연성을 동반해야 하기에 대중에게 납득을 시킬 만한 근거가 있는 행동이어야 하겠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모든 개연성을 입력한다면 모든 이야기는 비슷해진다. '철수와 영희의 특별한 사랑이야기'에서 '철수와 영희의 사랑이야기'가 된다면 지루한 감상이 될 것이 뻔하다.


결국 늘 고민하는 것은 개별성과 창의력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를 두려워하고, 실패하는 것이 망신을 당하는 일이 될까 봐 주저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비웃음을 사는 일이 될까 걱정만 하고 있다면 내 인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만들어 온 과거가 이어져 내 미래가 되고 말 거다.


그러니 아직도 해야 할 실패가 너무도 많다. 웃음거리가 되고 무시를 당해도 한 번쯤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 내게 남겨진 숙제라고 느껴진다. 그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못할 내 인생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 눈치를 살피다 몰살당한 상상력의 탈환, 모방에서 멈춰 오리지널리티가 되지 못한 창작의 과제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 '틀렸다'는 오답에서 '다르다'는 개별성으로 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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