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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r 02. 2021

냉장고

냉장고 안 반찬은 왜 이리 빨리 상하는지

새벽에 잠이 깨 쓸데없이 냉장고 정리를 했다. 냉장고를 정리하는 일은 매번 힘이 든다.


나는 어릴 적 지독히도 밥을 먹지 않아 엄마가 식탁에 앉혀놓고 김에 밥을 싸 한 입 한 입 먹여줘야만 겨우 몇 입을 먹었다. 기골이 장대한 아빠나 형에 비해 유난히 마르고 작았던 내가 입까지 짧으니 걱정이 많았고, 저녁에 나가 아침 일곱 시가 돼서야 퇴근을 했던 엄마는 이미 오물거리는 내 입에 넣을 다음 밥을 김에 말아 손에 쥐고는 아침 식탁 앞에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항상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 애썼다.


그렇게 자라 서울로 간 나는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 요리를 할 줄도 모르고 해먹기도 귀찮아하던 탓에 냉장고는 작은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가 보내주는 김치통은 항상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컸고, 나는 그 많은 김치를 여러 작은 통에 나눠 넣는 것을 귀찮아했다.


그래도 엄마가 보내주는 김치가 마트에서 사 먹는 김치보다 몇 배나 맛이 있고, 요리는 못 해도 라면은 자주 먹으니 배추김치는 제법 빨리도 없어졌다.


자취생활이 조금 더 길어지고, 군대에 다녀온 뒤로는 조리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밥을 거를까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찌개, 국거리들을 소분하고 냉동해서 아이스팩 하나와 함께 스티로폼 박스 안에 넣어 보냈다.


그대로 꺼내서 끓여먹기만 하면 되니 꼭 밥을 거르지 말고 챙겨 먹으라고.


나는 엄마가 필요 이상으로 고생을 하는 것 같아 고맙다는 말 대신, 학교 다니기도 바빠 집에 있는 시간이 없으니 이런 건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야속한 말을 했었다. 물론,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국거리를 보내왔다.


부모님께 받았던 카드를 반납하고, 나는 요리실력이 부쩍 늘었다. 밖에서 사 먹는 돈이 축적되면 지출이 엄청나다는 것을 내 체크카드의 내역서를 확인하며 체감하게 되었고, 그 뒤론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남은 음식을 싸오거나 집에서 혼자 해 먹는 일이 많아졌다. 


냉장고는 점점 커졌고 할 수 있는 메뉴를 몇 개 정해 간단히 먹을 때에 주로 필요한 마늘, 양파, 계란, 젓갈 같은 것들을 항상 두었다. 


내가 돈이 없어 밖에서 먹는 것을 아낄까 걱정한 엄마는 용돈도 보내주면서 동시에 스팸이나 식용유 같은 것들을 택배로 보냈다.


집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마트에 가서 살 수 있는 제품들을 굳이 보내던 엄마는, 바쁘면 깜빡해 안 사게 되고 필요할 때 없으면 먹을 게 없으니 보냈다는 말을 했지만, 내가 햄을 사면서도 돈 걱정을 할까 하는 엄마의 염려가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꾸준히 김치를 보내면서 자주 장조림을 보내주곤 했는데, 장조림을 보내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꼭 전화를 걸어 한 번 푹 끓이면 상하지 않고 더 오래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여러 번 곰팡이가 핀 장조림을 버려야 했고, 엄마에게는 다 먹었다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나마 장조림 같은 반찬은 자주 꺼내먹기라도 했지만 콩자반이나 멸치볶음, 진미채 볶음 같은 마른반찬들은 냉장고 저 깊은 곳에 박혀있을 때가 많았다. 봄에 보내준 멸치볶음 앞으로 여름에 보내준 멸치볶음이 자리하고, 나는 그렇게 계절이 지날수록 차곡차곡 엄마의 멸치볶음을 냉장고 구석에 쌓아야만 했다.


냉장고 정리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방치해뒀던 반찬이 나올까 봐 두렵다. 엄마가 나를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만들었을 반찬이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말라갔을 생각을 하면 반찬통의 뚜껑을 여는 것이 머뭇거려진다. 곰팡이가 피지 않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나의 불효를 스스로 용서하기도 한다. 멸치볶음의 멸치들은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일수록 더 말랐다.


이제는 먹지 못 할 음식들이 음식물쓰레기봉투에 쌓이고, 싱크대엔 닦아야 할 빈 반찬통이 쌓인다. 손대지 않은 반찬으로 가득 찬 봉투는 고작 3리터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묶어 들고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것은 몇십 키로라도 나가는 것만큼 무겁다.


무거운 봉투와 무거운 발걸음을 집 앞 가로수에 기대 놓고 올라와 먹을 수 있는 반찬을 모두 꺼내놓고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었다. 일부러 골고루 한 입 씩 먹어가며 상하지 말아 달라는 기도와 함께 꼭꼭 씹어가며 눈물을 삼켰다.


-2018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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