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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r 31. 2020

구질구질한 삶의 여유

구구절절 긴 글을 남기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왜 쓰기로 마음먹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SNS에 올라오는 수많은 멋진 호텔의 수영장, 과도한 필터 효과로 실물과 다른 셀카, 명품, 비싼 레스토랑, 유명인사와의 인증숏, 외제차의 마크가 박힌 핸들, 근육미 넘치는 멋지고 섹시한 몸매, 남들보다 부지런하고 럭셔리한 삶, 깔끔하게 가꿔진 얼굴, 얼마만큼의 수익을 냈다는 성공한 사업가의 인증샷, 구도와 색깔을 맞춰 정갈하게 찍은 카페 테이블, 먼저 나온 음식이 식더라도 모든 음식이 다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찍은 항공 샷 등 온통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것들 투성이인 세상을 내 피드에서도 듬성듬성 발견하며, 부러워하지 않을 만한 삶을 마음속에서 꺼내기로 마음먹은 날부터다.


물론 진짜로 그런 일상 속에서만 사는 사람도 있겠고, 노력해서 이룩해낸 성과들을 기록하고 격려를 받으려는 경우가 다수겠지만, 추하고 민망한 민낯을 모두 외면하고, 구질구질하고 초라한 면은 모른 체하며 성공에 관련된 얼굴만을 보면서 계속 살아가다간 내 인생에 큰일이 생길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해서 모든 치부를 낱낱이 밝힐 필요까진 없더라도, 부드럽게 순화하고 걸러내 적어내더라도 타인들이 관심 갖지 않을 만한 일이나 초라한 생각들을 집어넣자고 다짐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젊은이의 여러 고민이나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정답은 모르지만 토론의 대상이 될 만한 주제도 거론해보고, 돈이 없어 빌빌대는 날이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들다는 징징거림도 마다하지 않고 솔직하게 적다 보니 다시 살 맛이 났다.


아마도 화려함으로 가득 찬 피드들을 보면서 불안감이나 환멸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모두들 나보다 앞질러가는 것처럼 값비싸고 멋진 것들을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에 현재의 나를 처량히 여기기도 했고, 본인보다 더 나아 보이거나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아가며 나름대로의 그룹핑을 하는 사람들, 실제로는 전화 한 통 하지 않으면서 SNS 상에서는 절친이 되어 교감을 나누는 사람들 속에 내가 있다는 것에 속이 메스꺼워지기도 했다.


물론 순기능이 있어 친목을 도모하고, 바쁜 세상 속에서 지인들의 안부를 묻지 않고도 쉽게 알 수 있으며, 자랑할만한 일이나 축하할 일과 슬퍼할 일을 자주 나누기도 한다.


이런 순기능에 가끔 더해지는 관심을 요하는 몸부림이나 허세는 귀엽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만, 그것이 사람을 지배하면 우리는 완벽해 보이는 그 사람으로부터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도 만취하여 오바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컵라면 하나가 간절히 필요하기도 하고, 유명 호텔의 수건을 휴지 쓰듯이 쓰다가도 집에 돌아와 더러워진 걸레를 삶아야 하는 날이 있듯이, 실패 따윈 없을 줄 알았던 내 삶에 건강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가진 것들이 아무 소용 없어지듯이.


많은 이들이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 행복한 일만 가득하면 그야 더할 나위 없지만, 우리의 삶은 희비가 무한히 반복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려고, 올라가는 날 말고 내려가는 날도 받아들이려고, 좀 못 산다고 남들 눈치 보는 것 좀 덜 하자고,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그래서 난 조금은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다고.


-201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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