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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r 23. 2020

가디건

소중히 여기게 된 이유

혼자 떠났던 강릉의 숙소에서 나는 옷걸이에 걸어놓은 가디건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걸려있는 옷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오랜 시간 쳐다보고 있으니 그 가디건을 입었던 날들이 생각났다.


그 옷을 입고 보러 갔던 오디션에서 합격해 그 뒤로 오디션엔 그 옷만 입고 갔다가 어느 날엔 떨어져서 옷장 속에 집어던진 날도 있었고,


그렇게 춥지 않던 낮에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쌀쌀한 밤이 되어 벗어주었던 날에 소매가 너무 길어 세 번을 접고서야 툭하고 튀어나오던 그녀의 손과, 술집에서는 짧은 치마 위를 덮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들었던 그날의 가디건이 떠올라,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종류의 옷이라고 느껴 가디건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생각하며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며칠 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김영하 작가가 나왔다.


소설가 김영하라고 자신을 소개하니 배철수 선생은 수필을 홍보하러 나왔으면서 소설가라고 소개를 하냐고 했고, 김영하 작가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만 글이라는 경계 안에서 수필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글을 쓸 때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옆방으로 가 작업을 한다는 이청준 선생의 얘기를 꺼내며 소설을 쓸 때는 본인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입장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더 경건해진다고 말했다.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아마 내가 나중에 연예인보다는 영화배우로 불리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똑같은 인생을 살았더라도 다른 사람 마음을 백 퍼센트 알 수는 없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 나로서 존재하고 이야기하는 시간과 다른 인물이 되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은 꽤나 달라서, 신중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14년 전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작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깡’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현재는 ‘깡’을 ‘에너지’로 바꿔서 표현하고 있는데, 예술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체하지 못할 만큼의 에너지가 있어야 계속 글을 쓸 수 있다고, 자주 평가받고, 그래서 자주 상처 받는 직업이기에 그 시간을 버틸만한 에너지가 있어야 된다고 말했다.


단기간에 많은 촬영을 하고, 오디션이 잡히고, 이제 뭔가 풀리려나 싶다가도 몇 주 잠잠하면 이내 불안해지고, 누군가가 내 연기가 그저 그렇다고 하면 약간은 풀이 죽어있다가, 갑자기 날 콕 집어 캐스팅하는 감독을 만나 하게 된 촬영이나 오디션이 생기면 또 설레기도 한다.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스스로에게 약속을 해놓고도 사람 마음이 또 그렇다. 좋아하는 일로 신이 나는 건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여행에 관련된 수필을 낸 김영하 작가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여행에 가서는 현재에 집중하고 돌아와서 그 기억을 되짚어가며 글을 쓴다고 했다.


사실 여행에 가서는 즐기고 감탄하기 바쁘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기도 하지만, 나 같은 경우도 모든 게 사실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나름대로의 실재와 상상이 혼합된 나만의 기억을 적어 내려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적은 글들은 사건보다는 그때와 지금의 마음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사실 우리는 사건보다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더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무슨 요리를 먹었다는 것보다는 그 요리가 어땠는지를 듣는 게 재밌는 것처럼.


자주 누워있고 공상을 많이 한다는 김영하 작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요즘 현대인들은 누워서도 스마트폰을 하면서, 가만히 있는 시간을 잘 못 견디는 것 같다고 하는 말에 공감했다.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하고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너무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의미 없는 자리, 의미 없는 물건, 의미 없는 하루에 지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의미 없는 여유를 부리고 나니 모든 것들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한정적인 시간 안에서 모든 의미를 경험할 수 없을 뿐, 내가 의미를 두지 않았을 뿐, 의미를 잊어버렸을 뿐.


그때 신이 나있던 나를 떠올리며, 옷장 속에 박혀 있던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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