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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Apr 14. 2020

엄마에게

엄마, 나는 어려서부터 인사성도 밝고 애교도 많아서 어른들이 많이 예뻐해 줬잖아. 엄마 가게에서 손님들이 다 보는데 그 앞에 나가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잖아. 그래서 엄마가 나는 커서 연예인이 될 것 같다고 했잖아. 근데 진짜로 음악이랑 영화를 좋아해서 형이랑 맨날 비디오 빌려 보고 라디오 녹음해가면서 놀고, 중학교 때는 밴드도 하고 유럽여행 갔다가 뮤지컬 보고 반해서 연기하고 싶다고 했잖아. 나는 기억해, 사람들이 다 나보고 무슨 연기를 하냐고 할 때 엄마는 내가 잘할 것 같다고 했잖아. 나는 엄마가 나 응원해준 거 기억해.

엄마, 그래서 내가 연기한다고 열여덟에 서울 와서 자취 시작하기 전까지 여기저기 신세 지며 살았잖아. 돌이켜보면 감사한 일 투성이지만 그땐 가족이랑 떨어져 다른 집에 얹혀사는 게 눈치도 많이 보이고 주눅도 들고 그랬는데 그래도 연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하나도 안 힘들었어. 연기가 진짜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하루 종일 연습해도 힘든 줄도 몰랐어. 지치지도 않고 밤을 새도 쌩쌩했어.

엄마, 나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이제 성공하는 일만 남은 줄 알았어.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너무 스타가 돼서 엄마한테 차도 사주고 집도 사줄 수 있는 줄 알았어. 근데 학교 좀 다니다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연습생 하다 나오고 군대 다녀오니까 스물다섯이더라? 나는 그때까지 연기로 돈 한 푼 못 벌었어.

엄마, 그래도 연기가 재미있으니까 하루에 아르바이트 열 시간씩 하면서도 계속했어. 엄마는 매달 용돈을 보내주는데 나는 그걸로 술 사 먹었어. 엄마가 새벽까지 삼천 원짜리 생맥주 팔아서 보내준 돈으로 생맥주 사 먹었어. 열심히 살았다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노느라 바빴어. 엄마한테 차도 사주고 집도 사준다고 해놓고 내 월세도 못 내고 살았어.

엄마, 서른이 진짜 금방이더라. 엄마는 서른에 결혼해서 형이랑 나랑 낳아서 한 손으로는 형 잡고 등에는 나 업고 돈 벌었잖아. 엄마가 리어카 장사할 때 오르막길에서 한 발 앞으로 디디면 리어카가 뒤로 두 바퀴 가고, 다시 한 발 앞으로 가면 다시 뒤로 두 바퀴 가서 힘들었다는 얘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나. 뒤도 못 돌아보고 앞으로 밀어야만 했던 리어카 안에서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엄마, 서른셋이 되었는데 기미가 보이질 않아. 이 길이 진짜 맞는 건지, 계속해도 되는 건지, 몇 년 전에 방송한 케이블 드라마 채널을 틀어놓고 내가 나올까 봐 재방송을 기다리는 엄마를 보면 내 숨이 차. 우리 엄마가 이렇게 나를 예쁘게 키워줬는데 도대체 드라마 한 편 나오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화가 나.

엄마, 나는 진짜 트로피 같은 거 필요 없어. 상 같은 거 안 받아도 되는데 사람들 다 보는 데 앞에 나가서 엄마한테 고맙다고 한마디만 하고 싶어. 엄마가 나 키우느라고 진짜 진짜 고생 많았다고 한마디만 하고 싶어. 엄마 진짜 고생 많이 했잖아.

엄마, 이제 나 스타 안 해도 돼. 송강호, 최민식만큼 연기 잘하지 않아도 돼. 그냥 돈 걱정 안 하고 내일 걱정 안 하면서 살고 싶거든? 그러면 연기만 그만 두면 되는데,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뭘 배워서 취직을 하던 해서 월급 받고 그 돈 저축해서 계획도 세우고 살면 되는데, 이상하게 연기가 포기가 안 돼. 나 단 한 번도 목숨 건다고, 이거 아니면 죽는다 소리 해본 적 없는 사람인데 자꾸 이걸 하게 돼.

엄마, 그래서 내가 조금 더 해볼 건데, 엄마 괜찮아? 엄마 친구들이 다 전화해서 네 아들 테레비 나온다 소리 듣기 지겨울 때까지 해도 돼? 엄마 차랑 집 더 늦게 사줘도 돼? 엄마는 단 한 번도 나보고 그만하라고 한 적 없잖아. 마음 편하게 먹고 차근차근 하다 보면 좋은 날 올 거라고 엄마가 맨날 얘기했잖아. 그러니까 엄마는 나보고 그만하라고 할 자격 있어.

있잖아 근데 엄마. 나 엄마 말 믿고 더 해봐도 돼? 나 예전처럼 연기가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계속하고 싶어. 남으로 잠깐 사는 게 뭐라고 이렇게 하고 싶을까. 근데 엄마, 남으로 잠깐 살다 보면 남의 마음을 좀 알잖아. 나는 남의 마음을 알 것 같을 때 내가 되게 사람 같다? 내가 너무 인간처럼 느껴지는 거야,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게. 누가 내 마음 알아주면 눈물 나잖아. 그러니까 남으로 잠깐 사는 거 사실 진짜 대단한 거다. 엄마는 내 마음 알잖아. 엄마도 진짜 대단한 거야. 그러니까 엄마, 나 조금 더 해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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