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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y 29. 2020

안전한 관계

나는 2년 전에 왼손 새끼손가락이 골절 됐다. 지금은 뼈가 붙었지만 치료하는 과정에서 살짝 주저앉는 바람에 가운데 마디가 조금 두껍게 굳었다. 그래서인지 손가락을 접을 때면 미세한 통증이 아직도 느껴지는데, 그래도 그럭저럭 불편함 없이 잘 살고 있다. 물론 골절 당시에는 꽤나 불편함을 겪었다. 왼손잡이인 나는 새끼손가락 하나를 다쳤다고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불편함을 겪을지 몰랐고, 하나둘씩 오른손으로 바꿔서 생활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현재는 새끼손가락이 할 일을 다른 네 손가락이 더 열심히 하고, 예전보다 오른손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최근에는 왼쪽 귀를 다쳤는데, 아무래도 연기를 하다 보니 카메라에 자주 잡히는 얼굴 쪽에 변형이 생기면 안 돼 이어가드를 끼곤 한다. 스파링을 할 때엔 왼쪽 귀를 다쳤으니 조심해달라고 말하는데, 대부분의 상대들은 쉽게 기술을 걸 수 있거나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내 귀를 보호해주기 위해 애써 다른 기술을 건다. 그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상대의 배려로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내 상처를 건들지 않고도 나와 대련할 수 있으며, 나의 약점을 공격하지 않으면서 플레이를 이끌어 가려고 하는 상대의 태도에 감사하다.


 나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성격이 꽤나 괴팍했다. 그 시기를 언제로 정확히 나눌 순 없지만 눈 앞의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상 공격적인 태도로 임해왔다. 그 사람이 숨기고 싶어하는 상처를 캐치해 그 부분을 계속 언급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사정을 말할 때마다 핑계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여러 사건과 긴 시간을 통해 그런 버릇을 제법 많이 고쳤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나에게 그런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요즘은 누군가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적어도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나도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내가 그런 성격이었어서 그런건지, 비슷한 성격의 여성을 많이 만나왔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싫은 건 하지 않고, 고집 세고, 어디가서도 주눅 들지 않는 스타일의 여성에게 호감을 많이 느꼈다. 그런 여성과의 관계에서 나름 열정적인 시너지가 있기도 했지만, 다툴 때는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았고, 한 번 싸우면 오랜 시간을 남처럼 지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중 이십대 중반 쯤에 굉장히 차분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나의 관심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나의 자극에도 무덤덤하게 대답하던 그 사람과의 첫만남을 기억한다. 그녀와는 다툼 자체가 형성이 안 됐는데, 내가 화를 내도 그녀는 일단 앉아서 대화를 하자고 했다. 대화가 하기 싫으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잠시 있자고 했다. 내 화가 수그러들 때까지 그녀는 침착하게 기다릴 줄 알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우린 다시 대화를 통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나는 그 시절 이후로 괴팍한 성격을 나름 많이 고쳐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다혈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살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자주 물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눴고, 내가 가진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내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갖고 살아가는 과거의 상처나 아픔과 관련해 화를 낼 때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처음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기도 했지만 차차 그녀가 나의 아픔을 건드는 대신 안정감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를 기준으로 내가 만나야 하는 사람에 대한 기준이 조금 바뀌었다. 상대의 상처를 치유하진 못하더라도 그 상처가 더 덧나지 않게 어루만질 수 있으며, 대신 자신 있어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 해서 그 사람이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과 안정감을 주는 사람. 그래서 사실은 많이 변했음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인격적으로 성장하곤 한다. 물론,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는 게 먼저라는 것을 안다.

 스포츠는 승리가 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상처를 건들지 않으면서 승리하려는 사람은 분명 고수다. 관계는 승리가 목적이 아니다. 공생하고 사랑하고 배려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래야지만 스포츠든 사랑이든 패배하더라도 다시 도전하고 좋은 경험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에, 나의 상처는 서서히 치유 되고, 나의 마음이 점점 안정을 느낄 때,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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