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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r 14. 2020

러너스 하이

달리기를 말할 때 배우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한 해를 정리하고자 오랜 시간 카페에 앉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현재의 나는 어디쯤 와 있는지 생각해봤다.


사실 스물아홉의 나는 이십 대 중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는데, 이제 이 쪽의 생리를 조금 알게 됐기도 하고, 고 1 때 드라마 보조출연으로 시작해 배우가 되겠단 생각 하나로 열심히 노력하고 힘써온 지 십여 년이 흐른 반면 돌아온 성과가 적게 느껴지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고, 나름대로는 '이 나이쯤이면 그래도 어느 정도 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지내 온 이십 대 생활을 그래프처럼 그리다 보니, 문득 육상선수로 활동했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육상 중에서도 중장거리로 1500m를 뛰었는데, 1500m 달리기는 체력단련 때나 하지 운동회에서도 안 할뿐더러, 오래 달리기를 하는 남자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었기에 당시엔 매력적인 종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데 하필 나는 관심도 없는 체력장 오래 달리기에서 일등을 해버렸고, 얼떨결에 육상부에 들어가 매일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운동장을 몇십 바퀴 씩 돌고, 결국 대회까지 나가야 했다.



육상 트랙은 400m 기준이라 1500m 달리기는 트랙을 세 바퀴 하고도 3/4 정도를 달려야 했는데, 보통 승부는 마지막 한 바퀴 정도에서 난다고 볼 수 있다.
이해하기 쉽게 한 바퀴에 200m인 학교 운동장으로 얘기하자면 마지막 두 바퀴 정도에서 승부가 난다는 얘기다.


운동장 기준 일곱 바퀴 반을 뛴다고 했을 때 첫 번째 바퀴 때는 선두 그룹에 속할 정도로만 달린다.


속도를 100 중에 70으로 쳤을 때, 그 속도로 네 바퀴 정도를 유지하며 선두 그룹을 지켜 나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



네 바퀴 즈음되면 속도를 더 내는 사람과 지쳐서 속도를 늦추는 그룹으로 나뉘면서 또 다른 선두 그룹이 생기게 되고 이때 생긴 새로운 선두 그룹에서 메달이 모두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다섯 바퀴를 뛰었을 때 즈음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달리기 선수들은 이 순간을 이겨내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해서 몸과 머리가 가벼워지고 새로운 활력과 에너지가 생기는 시점이 온다.



이를 분명히 연습 때도 경험했고 이 경기에서도 제일 힘이 드는 그 순간만 이겨내면 러너스 하이가 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찰나의 순간 집중을 놓치거나 혹은 스스로 포기하고 두 번째 그룹을 선택하게 된다.


백 미터, 이백 미터만 더 이를 물고 달렸으면 한 층 가벼워진 몸으로 마지막 바퀴를 달리고 결승선에 도착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그때 그 대회에서 러너스 하이를 경험하지 못하고 두 번째 그룹에 속해 결승선을 통과했고, 결국 그 뒤로 육상을 그만뒀다.


경기가 끝나고 나는 생각했다. 눈 앞에 보이는 바로 앞 주자만 따라잡으면 내가 순위권 안에 들 수 있는데, 왜 나는 나를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속도를 늦췄는지.


물론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친 상태였지만, 분명 내 앞에 나의 미래가 놓여있었는데 나는 스스로 내 속도를 늦췄다. 조금 더 숨을 편하게 쉬고 싶어서, 조금만 천천히 뛰면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으니까.


내가 만약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한 발 더 내디뎌 앞 주자를 따라잡아 순위권 안에 들었다면, 그 이후의 내 삶은 어땠을까.


나는 올해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을 지독히도 무기력하게 보냈다. 마치 마지막 바퀴를 앞둔 그 날의 나처럼.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그때의 아쉬움을 다시 경험하고 싶진 않다.


일등을 할 수 있을 진 모르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 발걸음을 늦추지 않는 서른 살이 되어 삼십 대의 바퀴에 들어서야겠다. 러너스 하이를 넘어 결승선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201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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