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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Oct 28. 2020

불안


  이른 아침, 버스가 몇 번이나 정류장에 멈췄다 지나갈 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불면하는 이유는 결국 불안 때문이다. 가진 불안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할 수가 없다. 오늘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해서, 중요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누군가에게 말실수를 해서 등등 끝도 없다. 그 중에서도 제일은 무언가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음이 제일 크다. 할 일을 남겨두고 오늘을 끝내는 것, 그리고 내일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주는 불안이 숙면을 방해한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하려고 한다. 넋 놓고 살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일에 준비가 덜 된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평소 해야 하는 일이라고는 연기 연습이나 영화감상, 독서, 영어공부, 운동 정도지만, 10분짜리 단편 영화의 역할 하나만 주어져도 연구하고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라 일과에 마비가 온다. 더군다나 작품이 끝나기 전까진 계속 준비가 덜 된 기분이라 약속 하나를 편히 잡을 수가 없어 사회생활에도 지장이 생긴다. 한 번에 몇 편의 상업 작품을 병행하는 능력을 지닌 스타들이 봤을 땐 유난 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아직 작품이 일상이 아닌 배우들은 마음의 여유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번 하반기는 오랜만에 독립영화를 많이 준비하게 됐다. 시나리오를 직접 써야 하거나 제작 단계부터 함께 해야 하는 작품도 있었고 역할이 어려워서 고민을 많이 하는 시간을 보냈고 현재도 그런 고민들이 진행 중이다. 이렇게 작품이 연달아 물려 있으면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다. 시나리오나 캐릭터와 관련된 기사와 작품을 미친 듯이 찾아보다가 잠들기 전 술 한 잔 하는 것이 그 안에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다. 영어공부나 온전한 음악 감상 같은 것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나간 곳이 체육관이다. 주짓수를 배우고 있는데 하루에 길게는 세 시간, 보통은 두 시간 정도 운동한다. 바쁜 날에는 별 수 없지만 한 시간이라도 할 수 있다면 스케줄이 끝나고 나서 달려가 운동을 했다. 흔히들 그랄이라고 부르는 그라우(grau)라는 줄이 하나의 급수인데, 한 띠에 네 줄을 달고 그다음 벨트 승단을 하게 된다. 나는 화이트벨트 2그랄로 아직 초보자지만 태권도나 유도에 비해 승급이 오래 걸려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나름 노력이 필요했다. 


 다른 일들은 제쳐두면서도 굳이 체육관에 꾸준히 나가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체중 관리와 건강을 위해 운동이 좋은 건 당연하고, 꾸준히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는 것도 있다. 또한 많은 스파링으로 나의 실력을 체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분야도 매일 같이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다면 분명 실력이 향상될 것이라고 느껴질 만큼 다양한 사람과의 경쟁은 현재의 내 위치를 알게 해 준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이유는 계속해서 정신을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주 전, 체육관 선수들이 시합에 나갔는데 한 선수가 아쉽게 판정으로 졌다. 해설진들도 우리의 승리를 예상했을 만큼 우위에 섰다고 느꼈던 시합이지만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관장님은 애매하게 판정으로 가기 전에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지 못한 탓이라며 아쉬워하셨다. 시합이 끝나고 체육관 사람들끼리 남아 속상한 마음에 술을 연거푸 마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중요한 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수업이었다. 마무리를 짓지 못한 탓이라고 말씀하셨던 관장님은 기초 수업을 하셨다. 체육관에 처음 가면 배우는 기술로 한 주 수업을 준비하신 관장님은 마무리 대신 시작을 재정비하셨다. 기초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기술의 완성도는 디테일의 차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단번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서브미션보다 기초가 중요하다고.


  요즘 영상 문화계에는 전통을 중시하는 문화가 많이 사라졌다. 유명한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들보다 각자의 공부와 개성으로 다져진 타과 출신의 배우들이 더 많이 활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뻔하지 않은 연기와 특유의 센스로 사랑받는 배우도 많아졌다.

 전통을 중시하던 연극학도들의 활동이 지지부진해진 요즘, 누군가가 나에게 연극과를 나와서 무엇이 좋냐고 물으면 난 기초를 잘 배웠다고 대답한다.

 배우가 직업으로 연기를 오래도록 하려면 순간의 감각이나 감정으로 연기하지 말고 어떤 작품에 담기고 어떤 역할을 맡게 되던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고 배웠다.


 오디션에 임하는 배우나 시합에 출전하는 선수나 본인이 가진 필살기를 숨겨두고 있다가 적절한 때에 발휘한다.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매력이 필살기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무엇의 달인’ 같은 수식어가 붙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하지만 오래도록 질리지 않는 사람들은 필살기만 가지고 있지 않다. 필살기에 의존하지 않고 본인이 가진 기초 능력의 범위를 넓혀 더 다양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장수의 비결이 있다. 그래야만 필살기가 막혀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나는 계속해서 누구보다 잘할 만한 필살기를 계발하겠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기초를 다지고자 마음먹는다. 기본기 앞에서는 어디서도 부끄럽지 않을, 배우라는 사람이 지니고 있어야 할 실력과 정신을, 예술을 하려는 사람이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철학으로 무장한다.

 불안을 극복하는 것은 철저한 준비와 꾸준한 훈련이다. 내가 시간을 소중히 쓰며 기회에 대비하면 불안도 불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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