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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은 곰도 동굴 안으로 밀어 넣는다.

by 투스칸썬

"자꾸 깜빡깜빡해. 나이 들어 나한테 문제 생기면 주저 말고 시설로 보내. 원망 안 해."

반장난 같지만 마음에 있던 소리다.

남편은 사후 신체기증에 반대하고 보험이나 연금에 회의적이고 가족묘를 고집하는 둥 노후에 대해 나와 의견이 정반대인 사람이다.

그러던 남편이 부쩍 늘어난 흰머리에 난색 했다.

시댁에선 내 흰머리 넘겨준 것도 아닌데 우리 부부를 번갈아보시다가 "넌 염색 좀 해야겠다." 아들에게 하시는 말투가 좀 그랬다.

집에 와 묻지도 않고 염색을 해줬다.

머리는 젊어져도 마음도 덩달아 젊어질 리가.


허리가 자주 아프다 하고 앉았다 일어나는 데도 "끙"소리부터 난다고.

장이 말썽이라며 쳐다도 안 보던 유산균을 챙긴다.


우리 집에 최근 사춘기 문턱, 3.9 춘기 한 분 등극에 이어 오춘기 턱끝에 온 4.9 춘기 한 분 추가!

해결 안나는 고민을 왜 하는지 이해 안 되는 고민이 있던 남편 심기가 복잡하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면 되는데".

흘린듯한 말이지만 대꾸해야 할지 내버려 둬야 할지 이번에는 내 심기가 복잡하다.




ㅅ씨는 넉살 좋고 리더십 있는 남편의 절친이었다.

신혼집 근처에서 남편과 만나면 빈손으로 들려 보내는 적이 없었다.

아이스크림이나 롤케이크를 번번이 챙겨주고도 자기 자식을 맺어준 양 나만 보면 "재수 씨 고마워요." 하는, 남편에게 큰 형님 같은 사람이었다.


코로나를 겪으며 벌려놓은 사업이 휘청거리고.

기러기 아빠에, 병든 노부를 부양하느라 고생한다기에 안쓰러움이 컸고 동분서주하느라 남편과도 통 못 만나는 눈치였다.




급전이 필요할 때 우리가 손 내밀 곳은 어디인가.

돌고 돌아 절친이지만 수입 빤한 남편에게 딱 두 달이면 된다고 사정하더란다.

아내의 입장이자 ㅅ씨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으로서 말했다.

"당장 전액은 힘들고 절반만 바로 마련해서 보내줘요. 대신에 못 돌려받아도 괜찮다는 마음이 생기면 보내요."

동의하기도 전에 보내온 계좌번호에 남편 기분이 살짝 불편해졌단다.

받지 않고 돕는 거로 하고 남편이 약속 기일을 잊길.

무엇보다 속히 해결되어 남편이 도움이 되어 기분 좋게 술 얻어먹길.




돈을 잃는 건 그렇다 쳐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매번 인간이다.

약속일자가 훌쩍 넘어갈 때도. 말 그대로 친구 도운 거려니 하면서. 상환의 기대나 사업이 제 궤도로 돌아가길 바라는 친구로서의 마음을 떠나서.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그리 어려운지.

혹은 우리 사이에 굳이 해야 하나라고 생략했든.

남편은 많은 상처를 받은 후였다.

대소사에 늘 앞장서는 ㅅ씨인지라 모임에 여전히 나와 술잔을 맞대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한마디 없었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

내 위로는 되려 자존심 상할 것이다. 불필요하다.




주말에 조의금 챙기는 검은 양복의 남편은 표정이 안 좋다.

친구 아버님 상에 가서 얼굴 마주하게 될 것이, 빌려준 사람이 돈 빌린 사람 눈치를 살피는 상황이, 돈거래의 위악이다.

그래도 내 편인 남편을 편드느라 "아뭇 소리 없으면 속이 오죽할까, 하고 잊어요. 너무 태연해 보이면 사람 잘못 봤구나, 잊어요."

사회성 밝은 ㅅ은 장례식장 선두에서 상주보다 더 큰 일을 해내며 좋은 사람 노릇을 할 것이다.

옹색한 속을 감추지 못해 인상 쓰고 자기 속 관리가 안될 사람이 되려 남편이라는 것이 씁쓸하다.


양복으로 갈아입으며 뺄랫거리로 나온 남편 실내복 바지 주머니 속을 홀랑 까본다.

실밥과 먼지들, 동전 두 개, 영수증.

엄마는 쓰레기통에 탈탈 털어 비워낸다.

남의 속도 이렇게 죄 들여다보고 "그랬구나, 속에서 이런 일들이 있어서 그랬구나." 하면서 토닥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성에서 온 남자의 동굴문화는 금성 여자와 다르다.

동굴에 잘 안 들어가는 대신 한번 들어가면 한참 걸린다.



출처 픽사베이


남편이 동굴 안에 들어간 적이 있던가.

곰도. 배신은 동굴 안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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