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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칸썬 May 24. 2023

오동통한 누룽지 한 그릇 몰고 가세요.

너구리 라면이 불혹을 넘겼단다.

아이일 때 먹던 너구리를 엄마가 되고 내 아이와 끓여 먹는 너구리.

초등부터 좋아한 너구리 두어 봉지는 늘 쟁여놨는데. 없다. 

오동통한 면발에 다시마 하나가 딱 필요한 참에

엄마표 누룽지 한봉 발견.

오호라 디야!


벽걸이 에어컨에 선풍기, 모기장까지 빼내 다용도실이 텅 비었다. 여름준비는 끝낸 대신 뽀얘진 창턱과 바닥 먼지를 쓸고 닦으니 녹초.


라면 전용냄비에 너구리 대신 누룽지를 담고 라면물보다 약간 더 물을 채워 불에 얹는다.

물 한 컵을 마시고 싱크대에 놓인 컵과 포크를 부시고 트레이에 수저세트를, 냉장고 안에서 한입거리 김치찌개에 장조림을 꺼낼 즈음.

조금씩 누룽지 냄비에서 동요가 일어난다.



마트나 온라인 쇼핑으로 누룽지도 먹어봤다.

다 먹기도 힘들 지경인 엉터리 누룽지, 우러나는 깊은 맛은 어림없는 무늬만 누룽지.

팔팔 끓이다 보면 죽처럼 풀어지거나 혀에 닿기 무섭게 사그라드는 흐물대는 누룽지는.

내 입에는 아니었다.

알알이 조각조각 살아있는 이 좋다.

너구리 굵은 면발과 핑크 손톱 테두리의 어묵처럼.

특화된 쫄깃 누룽지가 내 엄마 누룽지이다.



내 엄마 누룽지가 엄마표 문화로 자리 잡기 전, 효시라면 죽 대용식이나 밥에 물 말아먹는 대체품이 아닌 주먹밥이었다.

엄마네에서 출근하던 시절에 일찍 출근해서 모닝커피 전에 먹으라 싸주신 꼬들한 누룽지 주먹밥.

김이  빠져 몽글몽글누룽지의 살아 움직이는 맛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뇌도 충분히 깨어나고 포만감에도 그만이었다.




이후 뜨끈한 누룽지에 익은 배추김치를 받아먹기에 엄만 멀리 계시고 누룽지를 박박 긁어내어 부은 숭늉 맛이 그리웠다.

엄만 한입거리 주먹 누룽지 대신 뚝딱 끓일 마른 누룽지아이스박스에 담아 보내기 시작하셨다.

라면 끓는 속도만큼 빠르고 너구리처럼 탱탱한 누룽지의 맛!


계절마 양질의 쌀에 조조나 잡곡 약간을 섞어 가스레인지 옆에 종일 붙어 불조절하신 엄마.

밥을 만들다 생긴 누룽지를 긁어내는 대신 누룽지를 만들다 밥이 한솥 생기는 식이었다.

밥솥에 안친 밥 아래에 덤으로 들러붙은 누룽지의 노하우가 발전하여 누룽지 달인 등극에 이른  엄마 누룽지 기술.


노릿노릿 고소한 누룽지를 식탁 가득 죽죽 펼쳐가며 누룽지를 말리셨다.

이틀이고 삼일이고 한 상 가득 꼬들해지면 바삭해지기 직전에 봉지봉지에 소분하셨다.

하시지 말라 하고 싶어도. 모른 척 받아서 먹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마다할 수가 없다.




감기몸살이든 입맛 살리기 구원투수누룽지 한 그릇 몰고 가면.

끝내주는 맛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으니.

내 엄마는 아파도 안되고 고된 손길 멈춰서도 안되니. 이런 불효막심이 어디 있을까.


누룽지를 딱 한 번 더 주십사. 하고 말았다.



주말 내내 5킬로그램의 쌀을 누룽지 오동통하게 만들어 보내오셨다.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을 밥솥에 얹힌 누룽지 익어가는 소리 속에서 고군분투하셨을 내 엄마.

입맛 떨어진 내 아이, 늦은 시각 학원 마치고 돌아온 내 아이가 호호 불고 나면 목으로 술술 넘어가고

남편이 후룩 마실 숭늉 보너스.


내 엄마누룽지를 멈춰야 하는데.


오동통한 너구리를 몰고 가는 대신 보약 같은 탱탱한 누룽지가 밟히는 건.

나이 탓인가. 계절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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