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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칸썬 Jul 04. 2023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장류진 저 [연수]

요즘 자주 하는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 또 그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착한 사람이 나를 납치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 그래서 딱 한 달만 날 가뒀다가 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같은 것을. 혹은 큰길을 건널 때 작고 귀여운 폭스바겐 비틀 이 나를 경쾌하게 탁, 치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살짝만 다쳤으면.(.....) 예쁘게 실금만 갔으면, 그래서 다시 예쁘게 붙을 때까지 딱 두 달만 깁스하고 누워 있으면서 누군가 날 먹여주고 재워주고 닦아주면 좋겠다는 생각.


-장류진 소설집 [연수]의 [동계올림픽] p271에서



눈여겨보는 기대주 작가의 신간이 대박이다.

여섯 작품을 한편씩 읽어가는데 하나같이 탱글탱글하송알송알 살아있고 뼈마디가 심도 깊다.

일등의 완주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다 우와, 정말 일등 먹었네. 장하네! 가슴을 쓸어 담듯.

한 작품, 한 작품이 그런 마음이었다.

특히 이전에 묶여서 나온 여러 작가 작품 속에서 단연 눈에 들어온 [연수]는 다시 봐도 참신하다.

이 정도는 되는 글들을 묶어 내는 게 소설집이다.

실격되어도 다시 올라서는 투지를 억세거나 다부지게 표현하지 않아서 한없이 멋진.


하나같이 경로를 이탈하면서도 툭툭 차오르는 발길질이 반갑다.





아이는 해가 갈수록 태평하고 낙천적이다.

수심이 많고 생각이 여러 갈래이던 아이도 참 이뻤지만 지금은 지금대로 생기발랄해서 엄마 눈에는 이쁘다.

친구들과 놀고 있다더니 "여기가 어디야, 엄마?"하고 걸려온 전화에 화들짝 놀랄 밖에.

버스도 거꾸로 타더니 지하철 노선으로 알려줬더니 이 역시 거꾸로 타서 열심히 한강을 건넌단다.

혼자서 버스도 지하철도 처음인데.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일단 다음 역에서 내려" 이어서 "어서 와서 뭐 먹어야지"  태연하게 덧붙인다.

일단 편에게 하지 않기로 다.

해결이 우선인데 호통부터 치느라 배가 산으로 더 높이 가고 말 테니까.


돌고 돌아 집에 와서도 아이는 놀란 가슴은 고사하고 쏟아낼 말이 급하다.

출발할 때부터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까지 들고 있는 음료수 컵이 화두이다.

"어디에도 휴지통이 없는 거야, 엄마. 그래도 길가에 버릴 수도 없고. 이거 들고 오느라 계속 앞만 보고 직진한 거지. 엄마가 그랬잖아. 우리 동네는 길이 잘 닦여 쭉 앞만 보고 가면 나온다고."


가야 하는 방향을 묻는 대신 근처에 혹시 휴지통이 있냐고 묻다 엄한 반대방향으로 직진한 아이.

마시던 일회용 컵을 어른들처럼 길가에 슬쩍 놓고 가버리는 일탈문화의 유혹에서 승리한 것에 의기양양하다.


출처 픽사베이


남편은 아이를 붙들고 휴대폰으로 길 찾기, 지하철과 버스 방향 표시 확인방법 등을 설명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아이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가만 바라만 본다.

헤맸지만 잘 왔잖아, 해냈잖아.

울고불고 경찰서 앞이 아니라 내 힘으로 엄마표 내비게이션 쫓아 쫓아 결국엔 목적지에 도착했잖아.

경로를 벗어나도, 설렁 원하는 바가 아니었어도 다시 설정하는 기력이 중요한 거야.

극복하고 이겨내는 힘.


출처 픽사베이


모로 가도 잘 왔으니 됐다,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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