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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칸썬 Jan 30. 2023

오늘 또! 지웁니다.

둘째헌 문제집으로 수학을 풀리는 건 아니다.

큰애도 그랬다.

두 학년 위인 오빠가 풀다만 사고력, 경시 대비용, 상위 몇 프로용 문제집.

똘똘한 오빠가 풀이한 과정을 한참 들여다 보고 손도 못 댈 문제도 첫 단추시도하고.

우리 집 평범 이들은 돈 주고 살 일 없는 레벨의 종류라서 친구 아들 문제집물려받았다.

큰 아인 지운 흔적 남은 문제집도 흔쾌히 보습학원에 가져가서 풀었.

군데군데 지워놓거나 펜으로 쓴 답안은 건너뛰며 알아서 풀겠단. 괜찮단다.




둘째의 학기 시작은 빳빳한 새 문제집으로 한다.

응용서부터 누나 문제집을 물려받는다.

새 문제집은 앞쪽만 끄적끄적. 단원평가 대비 몇 장 이후 끝.

되려 헌 문제집은 라는 족족 풀어 완주, Hooray!

새 느낌보다 누나 흔적이 더 흥미로운가?



처음에야 엄마도 반신반의했다.

지우긴 무슨? 한 권 사면 되지.

당연히 그랬다.

손목도 손마디도 손뼈도 안 좋은데. 굳이?




이미 한번 훑고 지나간 문제집을 다시 풀 상태로 돌려놓는 건 호락호락하진 않다. 

널찍한 탁자에 신문지를 한 면씩 잘라 여러 장 깔고 깨끗이 지워지는 지우개를 준비한다.

두세 번 꼼꼼하게 살펴서 단원별 내용은 훤한(둘째용이므로 엄마표 교과 과정도 두 번째) 상태라 문제집의 지울 부분, 다시 말해 풀릴 부분과 스킵할 쪽들 구분은 뚝딱이다.


전체적으로 슥슥 지우고 세밀한 구석구석을 처리하는 것은 초등 이상이면 다한다. 일도 아니다.

문제는 지우개똥 처리다.

툭툭 털어버림 그만이라고 얕잡아 보다간 두두둑 떨어지는 지우개똥. 조심해야 한다. 큰일 난다.

지우개똥 한가운데를 찍찍이가 쭉 훑으면 끝인 문제지 종류도 있지만.

찍찍이가 들러붙어 문제지가 엉망 되거나 힘주면 부욱 찢어지는 얇은 재질의 종이도 있다.

지우개똥 먹는 무당벌레 청소기는 너무 더디다.


내 아이가 소중한 시간을 들여 공부할 문제집을 엄마가 공들여 지우는 과정은 누군가에겐 시간낭비에 비효율, 맞다.

내겐. 공백을 만들어가는 동안 집중과 여유가 헤쳐 모이는 뜻밖의 시간이다.

모든 문제집을 말끔히 싹. 지우는 게 목적이라면 그건 아니다. 몸이 축난다.

응용 단계의 여러 문제집 중에 풀릴 부분들을 엄선해서 한 번에 한두 단원만 집중공략.

뭐 그 정도는.


지워가면서 한편으론 아이와 함께 풀어가고 오답을 고심하던 그 학년과 그 시기로 엄마표의 추억 되돌리기가 된다.

큰애의 연필 자욱이 사라지고 남은 동그라미와 체크 흔적 위를 

둘째의 다른 필체와 다른 컬러의 색연필로 동그라미 또는 체크가 덧씌워지는 우리 집 문제집들.


지우개똥이 한가득 쌓이고 길쭉한 지우개가 조각조각 나있고.

뭉글뭉글한 느낌 좋은 검정과 빨간 색연필이 옆에 가만히 놓여있다.

아이가 풀 새 단원이 단장을 마쳤다.

엄마는 오분이라도 더 붙잡고 싶은, 엄마만의 문화가 있는 고적한 시간.


출처 픽사베이


오늘도 또!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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