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살은 새해 다짐을 닮았다
*연초에 작성한 글을 풀어 봅니다.
오랜만에 풋살을 했다. 원래 뛰던 팀이 활동을 하지 않게 되면서 타의로, 공채 준비 때문에 자의로 몇달을 쉰 뒤다. 혼자 번개를 뛰어 본 적도 없어서, 결국 미루고 미루던 새 팀을 구하게 됐다. 팀은 구했는데, 처음 동호회에 나갈때 얼마나 어색했는지 기억해내지를 못했다. 그덕에 처음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죽을만큼 어색했다. 하필 처음 나간 날이 팀의 송년회 날이어서 (나는 정보를 보고 알고 있었지만, 팀은 나에게 알리지 않았다) 경기를 뛰지 않는 사람들도 왔는데, 그래서 더 어색했다.
나는 운동을 시작하기 전 청사진을 그린다. 마치 새해를 앞둔 한명의 지구인처럼 아주 구체적이고 명료한 그림을 그린다. 한명 제치고, 두번째는 꺽고 공간 만들어서 슛, 골인! 그 뿐인가, EPL 맨시티 경기 하이라이트에서 보던 쓰루 패스도 그려본다. 수비수 둘 사이로 길게 패스를 찔러주면 우리팀 공격수가 미친듯이 달려가서 공을 잡은 다음 손 쓸 틈도 없이 슛을 날리고는 그대로 골망을 가르는. 그래서 골보다 어시스트를 한 나에게 '풋살도사*'라는 닉네임이 생기는 그런 패스.
신발을 갈아 신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한 시간짜리 훈련이 시작됐다. 마음 속에 나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자 이제 실전이다. 아자아자!' 스트레칭을 하면서 또 한번 여전히 유연한 내 몸에 감탄한다. 다리가 조금 짧은가? 싶은 자기 의심이 잠시 고개를 들지만, 일단 미뤄둔다. 부정적인 생각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 새해가 다가 오고 있지않은가. 스트레칭이 끝나고 패스 연습이 시작됐다.
"이렇게 돌아가서 패스 한다음 다음 포스트로 움직이시면 되요."
훈련 담당 선수의 지시에 '네' 하고 대답 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 다시 한번만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가르치는 사람은 처음 왔다고 칭찬도 해주고, 더 신경써서 알려준다. 상대가 말이 많아 질 수록 나는 더 허둥대고, 나와 훈련을 받던 다른 둘마저 템포를 놓치고 만다. 선생 역할을 하던 이는 급기야 말을 하다 말고 웃음을 삼켰다. 마치, 1월을 채 보내지도 못했는데 가방 구석에 숨어 나를 비웃는 텅빈 스케쥴러 처럼. 기분이 나빴다. 다시 아까 그렸던 청사진을 떠올리며 '정신차리자, 정신' 하고는 이를 악문다.
능욕의 패스게임이 끝날 즈음 회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게임을 하기 위해서 각 팀 다섯씩 총 열명이 필요한데, 눈 깜짝할 새에 열명이 넘었다. 아예 뛸 생각이 없어보이는 이들도 롱패딩을 입고 자리를 잡았다. 이럴 거면 왜왔지? 아 회식한댔지. 다시금 오늘 골을 넣어서 회식을 가는 모든 기성 회원들에게 어필 하리란 무용한 다짐을 한다. 그리고 '선생 너. 아까 웃었지? 게임 시작해봐라, 두번 재쳐 줄께' 라는 알 수 없는 협박 멘트도 날린다. 물론 속으로.
이윽고, 팀이 나눠지고, 눈을 슥 돌려 신발을 갈아신은 이들의 머릿수를 세며 하프 라인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교체 따윈 없겠구나, 두시간 내내 펼쳐질 풋살 지옥을 직감한 순간 휘슬이 울렸다. 포근한 올해 겨울 답지 않게 유독 날씨가 흐리고 추웠다. 한 경기를 뛰고 나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내리는 올해 첫 눈이었다.
눈이 점점 굵어지더니 시야가 방해될 정도가 됐다. 잔디는 미끄러웠고, 발은 조금씩 젖어갔다. 정말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첫날 이런 강추위라니.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허락된다면 롱패딩이라도 입고 뛰고 싶었다. 사람들은 산책을 하다말고 멈춰서서 우리 경기를 구경했다. 그런 날씨에 목숨걸고 뛰어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 밖에 없으니까 구경할 만도 했다. 경기의 결과나 선수들의 고통과 상관없이, 금연이나 금주처럼 좀 지독한 우격다짐처럼 보였을거다.
경기는 두시간이 다 되기 몇분을 남겨 놓고 끝나버렸다. 나는 아직 보여줄게 많은데...하는 아쉬움이 들면서도 몸을 빠져나오는 숨은 썍쌕 소리를 내며 거칠었다.
새해가 딱 풋살같다. 그리는 그림은 분명한데, 자꾸 태클이 들어온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고 앞에선 누가 막아댄다. 혼자서 다섯을 상대하는 듯 벅찬 기분이 든다. 정작 내가 공을 빼앗기는 건 부정확한 패스때문이었는데. 나는 때로 혼자서 고꾸라질때도 있었고, 패스를 달라며 손을 휘젓다가 머쓱해지기도 했다. 기가 막힌 오프더볼 움직이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연초에 그리는 거창한 계획이 딱 이렇다.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지는 공간 창출은 마치 능력치의 5배수 쯤 되는 내 탈락 경험과 닮았다.
상대 팀 공격수도 우리 팀 수비수도 혼자서 라인 밖으로 공을 날려버리거나 공을 몰고 가다가 공과 함께 나가버리기도 했다. 모두가 개발인데도 골은 터졌다. 그와중에 나는 두 골, 1 도움을 기록했다. 아무리 뛰어도 패스 하나 받지 못하다가 우연히 흐른 공을 잡아다 힘껏 차올렸을 뿐인데 공은 순식간에 골망을 갈랐다. 눈깜짝할 사이에 스코어가 바꼈다. 계속 끌려가던 경기가 좀 해볼만한 경기로 태세 전환을 했다. 한골차가 된다. 기대가 된다. 어쩌면 이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아직 연초는 오지 않았다. 나는 이 팀에서 첫 경기를 뛰었을 뿐이다.
사진 설명*
영국에서 논란이 된 란제리 풋살팀. Sexist 적인 발상이라며 비판 받았다. 선수단 측은, 이렇게 불러들인 관심으로 임금격차를 줄일 수 있을 거라고 했다는데 (이 발언은 문제가 될만 하다)
이유가 어쨋든, 멋있는데?
*풋살도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 둘인 EPL 맨시티의 케빈 데브라이너(KDB), EPL 리버풀 FC 알렉산더 아놀드의 별명 '축구도사'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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