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이제까지 퀴어 영화를 참 많이도 봤다.
이성애자인 나에게 영화 속에서만 사실인 동성애는 다분히 ‘영화적인 서사’나 ‘예술적인 소재’라고 읽혔다. 그러나 내가 퀴어가 아니라고 해서 동성애 영화를 보며 이것을 남의 일로 느꼈던 것은 아니다. 카메라 렌즈가 담아내는 시선 중 이 분야만큼은 시대의 시선이 가장 기민하게 받아들여져야 함에도, 꾸준히 시선의 섬세함은 결여되어 있었다. 레즈비언의 로맨스를 그리는 영화가 제작을 마친 뒤 ‘노출을 강요했다’, ‘무리한 촬영을 반복해서 요구했다’ 등의 잡음은 너무나 빈번해 이젠 노이즈 마케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2010년 대에 들어 여성 서사를 다룬 영화 중 가장 흥행했던 영화로는 <캐럴>, 가장 성공했던 영화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내가 가장 좋아한 영화로 <아가씨>를 꼽을 수 있다. <캐럴>에 대해선 이견이 없겠으나,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내용과 칸 황금종려상, 파격 면에서 단연 성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황금종려상 괴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아무르>에게 당했는데, 다시 당하다니.’
다르덴 감독의 오랜 팬인 50대 주부가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관람한 뒤 전한 소감이었다. 그녀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친구들과 보러 갔다가 시네큐브를 박차고 나와서는 맛집을 찾는 것으로 놀란 가슴을 달랬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007 카지노 로열> 이후 최고 주가를 올리던 레아 세두의 선택이 배우로서, 여성으로서 너무나 용감하다 생각하면서도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누군가의 성욕을 채워주고 싶은 퀴어 콘텐츠’ 였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그만큼 필요 이상으로 수위가 셌고, 감독에 대한 인터뷰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영화 <캐럴>이 입소문으로 떠들썩할 때도, 눈이 황홀한 한편 시선의 고루함 같은 걸 지울 수 없었다. 싸구려 영화에서 야한 잡지를 보고 침을 흘리거나, 어떻게 여자 한번 꼬셔보려는 지질한 남자의(주로 트렁크를 입고 있는) 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시선이 그랬다. 누가 봐도 핫한 여자가 되고,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카메라는 주인공의 몸을 훑고. 어디선가 많이 본 격정적인 러브신이 넘실댔다. 섬세하다기보다는 너무 기술적이어서 단박에 기성품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장면들. 사실상 남녀가 출연한다 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극본이라 더 그랬을 것인데, 영화가 끝나고서 ‘색감이 아름답다’고 말하고는 그만두고 말았다. 정말 아름답긴 했으니까.
이런 영화들은 그동안 많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카메라'가 가장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어디에 얼마큼 공간을 남겨두고, 여기서 찍을 것을 굳이 그 뒤에서 찍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선’이 살아있었다. 대부분 설명하기가 매우 미묘한데, 그중 가장 대놓고 이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은 노출에 관한 것이다.
'영화 끝나기 10분 전이면 에라 모르겠다 벗어젖히고 그러겠지’. 그러니까 나는, 시대극에 드레스를 입고 있는 두 여인이라면 당연히 한 명은 침대에 누워서, 다른 한 명은 침대를 보고 서거나 뒤돌아선 채로 드레스가 한 번에 촥 벗겨지는 장면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영화 시작부터 제아무리 15분 만에 엘로이즈가 등장하는 템포라도. 왜냐면 내가 그간 봐왔던 영화들 대부분이 섹스신을 절정으로 삼았고, 감독들은 최대한 한 장면 한 장면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도록 만들어 왔다. 그리고 나는 매번 파블로프의 개가 그렇듯 침을 꼴깍꼴깍 넘겼다.
그러나 셀린 시아마 감독은 그 절정의 순간, 장면을 넘겨 다음날 아침으로, 잠들 다 깨어 나누는 대화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아무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고, 아무도 애원하지 않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호흡은 느리다.
영화 시작 15분 만에 아델 에넬(엘로이즈 역)이 등장하고, 노에미 메를랑(마리안 역)과의 접촉은 그로부터 1시간이 걸리는 이 영화의 속도는 그야말로 타다 말다, 타다 말다 담뱃불이 타들어가다가 꺼질 것 같은 그런 속도로 진행된다. 내내 조용히 타들어가는 드레스처럼 진행되던 사랑은 마지막 20분을 남겨두고 그 짧은 수명을 다한다. 드레스에 붙은 불처럼 빨리 꺼버려야 하는 사랑. 꺼져야 하는 사랑. 타올라서는 안 되는 사랑은 그렇게 정해진 대로 이별을 맞이한다.
바다와 마리안의 방, 주방 세 곳에서 대부분의 사건이 일어나는데, 옷과 공간이 계속해 반복되면 음악으로 지루함을 더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되레 음악이 거의 사용되지 않아서 중간에 피아노 연주에 ‘음악이 아주 없는 건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분위기에 마취를 당한 기분이었는데 옷깃, 발소리, 북소리, 마시는 소리 등 ASMR을 들을 때처럼 소리만으로 ‘그 장소에 있다’는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영화관에서 볼륨을 더 키워 줬다면, 관람 환경이 정말 좋다고 느꼈을 거다. 시종일관 있는 그대로의 소리만으로 채워지는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울려 퍼지는 사계를 더 공허하게 만든다.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여전히 혼자인 마리안은 화가이자 선생님으로 살아간다. 미술을 출품하고 “마지막으로 엘로이즈를 봤다”는 네 레이션이 나오고, 2층 공연석 맞은편에 무대를 보고 있는 엘로이즈가 보인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 네 레이션까지 마리안의 사연과 목소리라서 마리안에 감정이입이 되야겠지만, 천천히 가까워지는 엘로이즈에게 모든 감정이 이입되고 말았다. 마지막에 카메라를 마주 보며 끝을 낼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지 않는 엘로이즈. 이 관계가 진심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어떻게 보면 서사면에서 새로울 것 없는 이 영화는 나의 가슴을 짓이겨 놓았고, 나는 이틀이 지나서야 마음을 추스르고 리뷰를 적는다. 한편으로 ‘하지 말란 것을 이번에는 정말로 하지 않은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여성 서사 영화를 여성 관객이 ‘현실적’이라고 느끼게 하는 이 작은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크리스틴 스튜어드가 주연을 한 <리지> (감독: 크레이그 맥닐, 2018)을 비교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성인지 감수성이 높다는 당신은 바로 나다. 여자라서, 당연히 불편하게 여겼던 것들, 그러면서도 당연하게 느꼈던 것들을 곱씹어 보게 됐다. Must인 듯 떠오르는 것들을 답습하지 않으면서도 메시지를 전하는 것. 어쩌면 내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로 느껴진다.
*덧. 영화관 현장 분위기
평일 점심시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관람하러 아주 작은 극장에 들렀을 때도 ‘칸풍(Cannes 風)’을 타고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관람을 오셨다. 등장부터 50대 어머니들의 전형이었는데, 한 분이 자리에 쑥 들어가 앉으니 ‘거기 아니에요, 이리로 오세요. 선생님~ 선생님 같이 가요’하는 사교와 챙김의 대화가 넘실댔다.
다행히 영화 중간에 관을 나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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