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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Apr 14. 2024

벽돌책을 읽는 이유 3

[북리뷰]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상상. 2014.

1. "이런 책 한 권쯤 있었으면"하고 바라던 그 책 


 무언가를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이런 책이 한 권쯤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때가 옵니다.

 하나의 주제를 붙잡고 가다 보면, 그 하위 주제에서 하나의 맥락을 타고 뻗어나가는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책 저 책 찾아보지만, 딱 이거다 싶은 책을 만나기는 어렵더군요. 그러다가 간지러운 곳을 바로 긁어주는 책을 만나면 그렇게 속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이 그랬습니다.

 

 두 해가웃 출판문화에 대해 이런저런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궁금해진 것이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동네책방 운영의 지속가능한 운영이었습니다. 그때 만난 책이 브로드컬리의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_책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이었습니다. 가뭄 끝에 만난 단비였죠.

 그다음에는 ‘도대체 왜 동네책방인가?'에 대한 뜬금없는 존재론적 고민이 생겼습니다. 쓸데없이 이런저런 논문을 찾아보며 결이 맞지 않는 내용에 지칠 때쯤, 한미화의 『동네 책방 생존 탐구』를 만났습니다. 사이다 한 캔 원샷한 기분이었습니다.

 작년 이맘때 로스 킹의 『피렌체 서점 이야기』를 읽다가, 왜 우리는 금속활자도 일찍 만든 나라면서 출판문화는 발전하지 못했나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책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 강명관의 글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국가기록원의 간행물인 《기록인》 2015년 가을호에 수록된 <조선시대 책값은 얼마였을까?>는 정말 좋은 돌파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내용을 포함해 알찬 목차를 보여주었던 것이 이 책이었던지라, 금세 찾아 읽을 줄 알았습니다만... 1년이 넘게 걸렸네요. 여하튼 이제라도 타들어가던 목마름은 해결됐습니다.   



2. 벽돌책의 공통적인 문제점.


  로스 킹의 『피렌체 서점 이야기』 리뷰를 다시 읽다 보니, 모든 벽돌책들이 죄다 같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책이 이렇게 ‘벽돌’이 됐을 때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하고 마구 질렀을 때 책이 두꺼워집니다. 이런 벽돌들은 읽다 보면 짜증이 폭발합니다. 나름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당대의 사정이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루하고 불필요하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습니다. 둘째는 풀어놓다 보니 더 줄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방대한 주제를 다룬 경우입니다. 흔치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 앞엣 것이 이유가 될 때가 많습니다.
https://blog.naver.com/pdahnchul/223053726191

 이 책을 읽으면서도, 얼마 전에 읽은 에드먼드 포셋의 『보수주의』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쓸데없이 구구절절하다고 말입니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는 경우라면, 다음 레퍼런스로 접근하기 위해 그 구구절절함이 큰 도움이 될 테지만, 우리 같은 취미 독서가의 입장에선 ‘쓸데없이 고퀄’이 되곤 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붙들고 책을 읽는 이유는 한결같더군요.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3. 왜 조선은 출판문화가 뒤쳐졌을까?


 로스 킹의 책에서는 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술(movable type printing)에 대한 과도한 환상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럽에서는 12세기 대학 설립 시기부터 필사본의 산업화를 통해 폭발적인 지식 보급이 이루어졌고, 활자인쇄술이 지식 보급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도 16세기는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자꾸 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술에 견주어, 왜 조선의 출판과 지식문화의 보급은 발전이 더뎠는가를 ‘뇌절’ 수준으로 반복해서 지적합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보유국이란 국뽕이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은 충분히 동감하지만, 그걸 반복해서 ‘비난(비판을 넘어서 반복되다 보니 그렇습니다)’해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반감도 듭니다. 그래도 이만큼 제대로 된 연구를 통해 실증한 경우도 없다 보니, 이 책만이 갖는 의미는 큽니다. 이런 책이 한 권쯤 있어야만 한다고 봅니다.


 조선의 출판문화는 왜 정체됐는가에 대해서, 처음으로 접근하게 되는 건 ‘국가 주도의 출판문화’였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수요를 만들고, 수요는 공급을 재촉합니다. 성리학에 근간한 관리 채용 체제를 운용하던 국가였던지라, 수험서이기도 하며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정치철학의 소양이기도 했던 이들 성리학 경전에 대한 수요는 넘쳐 났다고 봤습니다. 다만, 이들을 공급하는 것이 국가에 전속되었기 때문에, ‘시장’을 형성하며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왜 국가가 출판을 주도했나를 알아봅니다. 답은 ‘비용이 많이 들어서’였습니다. 금속활자가 됐건, 목판이 됐건 인쇄 작업 자체가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보니,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기 힘들었다는 거죠.

 그다음은 인쇄하는 데 왜 돈이 많이 느나를 따져 봅니다. 우선 활자용 구릿값이 비싸고, 한자의 특성상 만들어야 하는 활자가 10만 개쯤 되어야 한다는 점도 큰 이유였습니다. 표음문자인 라틴문자와는 경쟁 자체가 될 수 없었다는 거죠. 거기다가 종이값도 말 못 하게 비싸다는 점이 또 높은 허들이 됐습니다. 같은 시기의 유럽에서도 종이값이 싼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닥나무로 수작업을 하는 우리의 닥종이와 비교할 수 없는, 물레방아를 활용한 섬유지를 만들어 썼기에 여기에서도 큰 격차가 생기고 맙니다. 닥종이는 수작업으로 만들다 보니 생산성이 몹시 떨어졌습니다. 생산량도 그리 많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종이에 비해 월등히 질이 좋은 종이를 생산했다고는 하지만, 그게 다 노동력을 갈아 넣은 덕이란 겁니다, 그래서 가격은 훨씬 더 비싸질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종이가 비싼 것만이 문제였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종이의 수요는 많은 데 생산량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단 원료가 되는 닥나무 산출량부터가 문제였다는 거죠. 상품작물로 재배해 이문을 남길 수도 없는 사회인지라, 노동력과 함께 공물로 수탈되다 보니 생산량이 늘어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종이의 원료는 부족하고 종이 생산에 노동력은 많이 드는데도, 그에 따른 생산 이득은 볼 수 없던지라, 종이의 산출량은 늘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종이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고, 종이값도 비싸고 활자나 목판이나 죄다 돈이 많이 드니 민간에서 나설 수도 없고, 혹 민간에서 나서더라도 시장에서 거래하기엔 책값이 너무 비쌌습니다. 시장을 통해 자유롭게 유통할 수 있는 수준의 물건이 아니라, 개인 간 중개인을 통해 거래해야 하는 고가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루터의 1534년판 독일어 성서 가격은 미숙련 노동자의 한 달 임금에 맞먹었다고 하는데요, 그와 비슷한 시기인 중종 24년 ”머슴이 1년을 고생해야 대학이나 중용 한 권을 얻을 수“있었고, ”주자대전, 주자어류의 값은 양민 25명이 1년 동안 내야 하는 군포의 양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인쇄술의 발명은 분명 독창적인 것이었지만 글자의 발명에 비하면 그렇게 대단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를 맨처음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동서문화사. 2021(3판).

조선은 개국 초기에 독자적인 문자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심지어 발음기관을 모방한 표음문자였습니다. 홉스는 "글자는 과거의 기억을 이어주고, 지구상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를 결합시켜 주는 유익한 발명품"이라 극찬하기도 했는데요,  그걸 제대로 살리지 못한 조선 사회에 대한 저자의 아쉬움은 참 큽니다. 아무래도 지식의 독점에 그치지 않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 '언문'을 통해 유포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본 듯합니다. 농부에게 필요한 지식을 유포하겠다며 『농사직설』을 인쇄해 배포하면서도, 한글번역본이 아니라 한문본을 인쇄했다는 것부터가 엉터리라고 지적했고, 더 나아가 가부장적이며 절대왕권적이며 귀족정주의적인 가치관을 강요하기 위해 『삼강행실도』만큼은 언해본을 더럽게 많이 찍어냈다는 것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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