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철 Apr 16. 2024

중간에 책장을 덮는 이유1

[북리뷰]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현대지성. 2021

1. 책이 재미없으면 책장을 덮어도 된다.


그런 책을 쓰려고 시간을 낭비하느니 회반죽이나 개는 게 더 유익할 수 있다.
Gâcher du plâtre est faire oeuvre bien plus utile que de perdre son temps à écrire de tels livres.

 57쪽에서 이 문장을 만나는 순간, 이 책을 그만 덮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책을 읽으려고 시간을 낭비하느니, 그만 덮고 그럴듯한 변명이나 정리하는 게 더 유익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저는 한 번 펼쳐든 책은 웬만해선 완독을 하는 편인데요, 짜증을 참을 수 없는 독서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책일지라도 끝까지 손에 쥐고 오기를 부리곤 했었는데요, 2년 전부터는 그냥 덮고 있습니다. '재밌는 책'을 읽기에도 인생이 많이 남지 않았는지라, 미련 부리지 않기로 했거든요.

 그러다 작년 여름, 중간에 그만 덮을까 여러 번 고민했던 김영하의 책에서 정말 좋은 문장을 만났습니다. 


책이 충분히 재밌지 않으면 우리는 책장을 덮고 책을 그만 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도 됩니다.
- 김영하. 읽다. 문학동네. 2015.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고, 책이 맘에 안 들면 책장을 덮으면 그만인데요. 그런데 자꾸 뭔가 찝찝하게 남는 감정이 있습니다. 뭐랄까요, 뒷다마라도 시원하게 까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는 그런 옹졸함 같은 게 남더군요. 김민희의 『다정한 개인주의자』의 책장을 중도에 덮었을 때가 그랬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다 읽지를 않았으니 그냥 넘기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꾸만 밑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래서 김영하의 『읽다』나 오세라비, 김소연, 나연준의 『페미니즘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는 끝까지 꾸역꾸역 읽고 혹평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겨우 그 정도 욕 좀 하려고 그걸 참고 읽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더군요.


 이도저도 아닌, 그래서 의문의 1패를 당한 듯한 기분을 떨쳐내고 싶었는데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읽지 않은 책도 리뷰를 쓰자고 말입니다. 이때 마침 우리의 사랑스러운 프랑스 친구의 책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앙큼한 주장에 기대어 글을 이어가 보렵니다.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훑어본다고 해서 책에 대한 평을 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책의 깊은 본성과 교양을 살찌우는 책의 힘을 존중하면서, 그리고 세부 사실에 빠져 길을 잃게 될 위험을 피하면서 책을 제 것으로 소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피에르 바야르 著/김병욱 譯.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여름언덕. 2008.



2. 책을 펼쳐든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재미있을 수가 없다.


 저는 "이런 책 한 권쯤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그 책"이라던가, 책 안에서 "제법 맘에 드는 해답을 찾아냈"다거나, "이런 의문점이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충족"된다면, 끝없이 계속되는 독서시간으로 지옥 같은 괴로움을 겪는다고 해도 "벽돌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벽돌책도 아닌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짜증이 샘솟더군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원하던 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늘 그렇지만, 독서는 다른 책을 끌어당기는 독서의 연쇄를 가져옵니다. 이 책은 여기저기서 제법 인용이 되곤 하던 책이었기에, 독서 대기 리스트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읽은 에드먼드 포셋의 『보수주의』에서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진지라, 도서관에서 대출해 왔던 터입니다.

 이 책이 발간된 1891년만 해도, 유럽의 사회과학은 꽤나 정교한 학문적 기틀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879년 빌헬름 분트를 시작으로 심리학이란 학문도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졌고요. 그렇다 보니, 저는 이 책이 인지심리학이나 사회심리학 차원에서 정교하게 분석된 심리학서일 줄 알고 책장을 펼쳤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수주의 사상가가 1871년 파리코뮌에 대해 느낀 적대감의 표출일 뿐이었습니다. 낭패감이 너무 컸습니다.

 19세기 신념에 기반한 정치철학은 상당수 사변적 서술에 기대게 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같은 책이 그랬고,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 그렇습니다만, 그 논변이 대부분 무릎을 치며 공감하게끔 합니다.

 그러데 이 책은 페이지마다 '응? 아니, 왜?'를 외치게 됩니다.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지 못한 논증이나 사례에 기겁을 하거나, 심리학에 근거하지 않고 '인상비평'에 근거하는 '뇌피셜'이 반복될 때마다, 지금 내가 뭘 읽고 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습니다.


여기에 번역에도 조금 불만족스러운 면이 있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근대어'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어에서는 peuple, race, nation, populaire, foule 같은 것들이 있겠네요. 가치중립적인 인민, 상상된 전체로의 민족과 그 민족에서 잉태된 국민, 탈가치적인 집단으로서의 대중과 군중까지 여러 가지 명사들이 정치학적 맥락에서 그 정의definition를 확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런 용어들의 번역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글의 맥락이 뚝뚝 끊기게 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