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동서문화사. 2021년.
제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읽은 티'를 내고 싶어서입니다. 누군가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그 내용이 어떤 책에 무슨 맥락으로 쓰였는지도 모르면서 가져다 쓰는 '병신짓'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습니다. 한 마디로 아는 척이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너무 '현학적'이란 핀잔을 듣곤 했었는데요, 그때는 그렇게 아는 척이 하고 싶었더랬습니다. 동년배들 사이에서 맛보는 지적 우월감이 꽤나 달콤했거든요. 그런 일이 잦아지다 보니 읽어보지도 않은 책들의 문구를 인용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 책을 읽지 않아도 그 내용을 아는 수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만인 대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 같은 꼰대들은 고등학교 국민윤리 시간에 홉스-로크-루소로 이어지는 사회계약설에 대해 배우면서 처음 주워 들었을 겁니다.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에서 자연상태를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로 규정하면서 성악설적 입장을 취했다는 걸 암기해야 했었죠. 주입식 교육의 힘이란 대단합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니 말입니다.
막상 나이를 먹고 나니, 홉스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어본 적 없는 주제에 그 표현을 그대로 끌어다 쓰기가 창피해지더군요. 그런 부끄러움을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에 나이를 먹고 '고전'을 다시 펼쳐 들게 됐습니다.
기술에 의해 코먼웰스 또는 국가, 라틴어로는 키비타스라고 불리는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창조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조인간이다. 다만 그것은 자연인보다 크고 힘이 세며 자연인을 보호하고 방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For by art is created that great Leviathan called a Common wealth, or State(in Latin Civitas), which is but an artificial man, though of greather stature and strengh than nature, for whose protection and defence it was intened; -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의 제목인 리바이어던에 대한 기술은 머리말의 저 문장이 다입니다. 심지어 단어 자체도 더 등장하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리바이어던이 뭔지에 대해서 홉스는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권두화에 욥기 41장 24절의 내용을 정리한 라틴어 문장을 하나 써넣을 뿐입니다. "Non est postesta super terram quae comparetur ei. Iob 41 24(There is no power on earth that can be compared to him.)"
이것이 교회ecclesia가 지배하던 시대의 상식이었나 봅니다. 성경의 시편, 이사야서, 욥기 등에 등장하는 이 괴물(톰슨 II 주석 성경에서는 '큰 악어'로 번역)의 이름은 어렵지 않게 이해됐던 모양입니다. 저같이 비 기독교도들은 1989년에 개봉한 영화 《레비아탄》의 모티브가 된 괴물이란 윤리 선생님의 설명에 기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이제 이 책을 '읽은 티'를 내려면 문장을 하나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로서 다음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인간은 그들 모두를 위합하는 공통 권력이 없이 살아갈 때는 전쟁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다.
Hereby it is manifest that during the time men live without a common power to keep them all in awe, they are in that condition which is called war; and such a war as is of every man against every man. - 143쪽
당황스럽게도 익숙한 표현이 나오질 않습니다. 영문 표현도 그렇고, 라틴어 표현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제게 익숙했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이번에는 위키피디아의 신세를 좀 져봅니다. 홉스의 또 다른 저작, 『시민론 De Cive』(1642)의 라틴어판에서 이 표현이 등장한다는군요.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에 의해 정립되기 시작한 자연법사상이 홉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그 기본 사상이 시민론에서부터 정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제는 좀 더 정확한 인용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독서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봅니다.
자연법에 관한 설명을 읽다 보니 어디서 본 듯한 문장이 하나 튀어나옵니다. 너무 익숙합니다. 마치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자연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마라.
Do not that to another which thou wouldest not have done to thyself. - 174쪽
작년에 읽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On Liberty』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와서 놀랐었는데요, 동서양의 철학이 시대를 관통하며 '위아더월드'를 외치는 게 아닌가 싶어, 소름이 끼쳤습니다.
Unless we are willing to adopt the logic of persecutors, and to say that we may persecute others because we are right, and that they must not persecute us because they are wrong, we must beware of admitting a principle of which we should resent as a gross injustice the application to ourselves. - John Stuart Mill. On Liberty. 1859.
이 책은 출판이 되면서 바로 교황청 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라갔습니다. 1559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교황청 금서목록에는 엄청난 수의 고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읽어봐야 할 고전으로 추천하고 있는 목록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죠. 맥락 없는 고전 읽기를 다시 이어가기 위해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이기도 한데요. 막상 이 책을 읽다 보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정도는 선행되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나 군주론 역시 금서목록에 올라 있습니다.
머리말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이 등장할 때만 해도, 왜 이러나 싶었습니다. 도대체 금서목록에 올라야 할 만큼 불온한 글이라 받아들여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오래된 또 하나의 격언이 있다. 이 격언을 마음에 새기며 노력했다면 사람들은 서로를 정말 잘 이해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 Nosce te ipsum, Read thyself는 격언이다.
사람의 사고와 감정은 누구나 서로 비슷하므로 스스로 자기 속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사고하고, 판단하고, 추론하고, 희망을 품고, 두려움을 느낄 때 무엇을 하는지, 또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떤 사고와 감정을 가지게 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29쪽 머리말 중에서
'1부 인간에 대하여'를 읽기 시작하면서, 스콜라철학에 대한 맹렬한 공격과 이상하리만치 반복되는 용어의 정의가 이어지는 걸 보면서도, 금서목록에 오를 수밖에 없는 책임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1부 13장 인간의 자연상태'에서 '16장 인격, 본인, 인격화된 것"에 이르기까지, 자연법에 대해 설명하고 왕권중심의 절대왕정을 옹호하는 억지스러운 논지를 전개하는 걸 보면서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족정aristocracy를 옹호하는 영국 귀족이나 크롬웰의 공화파에게 밉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회와 척을 질 내용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물론자적 태도가 살짝 교회의 눈에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어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2부 코먼웰스에 대하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다가 영국사회에서 매장당하겠다 싶을 정도로 과격하고 자가당착적인 절대왕정 옹호 논리를 펼치지만, 교회와 크게 척을 지는 걸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3부 그리스도쿄 코먼웰스에 대하여'에 들어가면서 경악스러운 수준의 '배교적 태도'를 드러냅니다. 거의 책의 반절을 그리스도교 코먼웰스를 까는 데 쓰고 있었습니다. 이러려고 1부에서 판을 깔았구나 싶어 지더군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거의 애교 수준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이건 숫제 이단심문관에게 끌려가서 파문을 당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도전적입니다.
그래서 3부의 후반부와 4부는 거의 읽지 않다시피, 대충 훑어보았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비 기독교도에게 성경 구절 하나하나를 따져가면서 교회의 세속지배를 비판하는 것들이 구구절절하게 다가오진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