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조동범.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도마뱀. 2022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2016년 2월 3일에 제정되었습니다. 약칭은 인문학법입니다. ‘~ 진흥에 관한 법률’이라고 불리는 특별법이 생기는 이유는 지원사업에 재정을 투입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법률을 좀 살펴보면, 별로 대단한 내용이 없는 편이기도 합니다.
법률 제정에서 유의미하게 봐야 할 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제2조의 정의(인문학법은 제3조)에서 그 대상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느냐가 첫 번째입니다. 누가 지원을 받게 되고, 누구는 배제되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전담 기구의 유무입니다. 이 법률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인력과 예산을 지원하느냐의 유무입니다. 인문학법의 진흥심의회 같은 기구로는 일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냥 모양만 갖추고 시늉만 내겠다는 속내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세 번째는 벌칙조항입니다.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강제성을 갖춰야 하며, 그 강제성을 담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벌칙이기 때문입니다. 벌칙조항이 없는 인문학법은 마찬가지로 ‘시늉’을 위한 법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인문학법에서 정의하는 인문학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건 정의를 내리는 건지, 정의를 더 모호하게 하자라는 건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언문사철(言文史哲)의 기본 개념은 통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3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인문”이란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 및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말한다.
2. “인문학”이란 인문에 관하여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언어학ㆍ문학ㆍ역사학ㆍ철학ㆍ종교학 등의 학문과 직관ㆍ체험ㆍ표현ㆍ이해ㆍ해석 등 인문학적 방법론을 수용하는 제반 학문 및 이에 기반을 둔 융복합 학문 등 관련 학문 분야를 말한다.
3. “인문정신문화”란 인문에 기반을 둔 정신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활동 및 유형ㆍ무형의 문화적 산물을 말한다.
중간 제목에 떡하니 ‘인문학적 글쓰기’라는 개념을 가져다 놓고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제미나이와 클로바엑스에게까지 물어봤을까요. 물론 어디서 주워 들고 온 건지도 모를, 그저 그럴듯하기만 한 답변을 여기에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인문학적 글쓰기라는 표현 자체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오인될 수 있을 듯합니다.
첫째는 인문학의 글쓰기입니다. 인문학으로 분류되는 학제에서 활용되고 있는 학문적 글쓰기 말입니다. 인문학 논문들은 자연과학의 논문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비과학적’입니다. 이 둘을 적당히 섞으면 사회과학의 논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의 글쓰기 역시 꽤 엄격성을 요구합니다. 자기 멋대로 쓴 것 같지만, 그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선행연구를 파악해서 보강하곤 합니다.
두 번째는 인문학 글쓰기의 방법론을 차용한 대중서 작법을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게 최근에 유행하는 인문학적 글쓰기의 형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문학자들도 참 많은 논문을 지도하고, 또 논문을 씁니다. 그 논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지식 체계가 생기는데요, 그걸 대중들에게 좀 더 편하게 읽히게 하려고 쓴 책들을 ‘대중서’라고 부르며, 어려운 ‘학술서’와 구분합니다. 학술의 별세계에 존재하는 흥미로운 사실들을, 인문학 연구 방법론의 엄격성은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이 읽기 편하도록 문장을 가다듬은 글쓰기가 바로 인문학적 글쓰기라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사회과학에서는 꽤나 많은 대중서가 나오곤 합니다. 그런 방식을 인문학에 적용하면, 인문학적 글쓰기가 된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최근에 제가 읽어본 책들에서는 박현수의 『식민지의 식탁』이나 『경성 맛집 산책』, 강명관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지바 미사야의 『현대사상입문』과 같은 책이 좋은 예가 될 듯합니다.
세 번째는 인문학적 내용을 가지고 자기 맘대로 쓰는 글을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바로 이 책처럼 말입니다. 인문학 방법론의 엄격성으로부터 벗어나, 지적 활동에 책임지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쓰는 글이 ‘인문학적’ 글쓰기라며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부분 아마추어들의 함량 미달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꽤나 의기양양하게 선언합니다.
이 책은 단순히 서울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여행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 책은 서울을 인문적 사유로써 이해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은 우리 삶과 세계의 상징과 비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7쪽 들어가며 중에서
하지만 처참하게 실패합니다.
시작부터 근대성에 대한 부정확한 내용을 확신하는 것으로 책장을 덮게 만들더니, 뒤이어 피맛골에 대한 남의 논문(전종환의 <도시 뒷골목의 ‘장소 기억’-종로 피맛골의 사례>) 내용조차 정확하게 옮겨내질 못합니다. 인문학적 글쓰기에서는 아주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무엇보다 1장 ‘근대의 시작과 근대도시 경성’에서는 비교적 인문학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는 글을 발견하게 되지만, 2장에서부터는 인문학적 함량이 떨어지기 시작해, 3장부터는 그냥 되는대로 쓴 글에 ‘인문학’이라는 레테르만 끌어다 붙인 모양새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고 싶어서 펼친 책인데, 그 반대로 ‘이거 너무 억지스러운데’라는 반감으로 책장을 덮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천천히 곱씹는 독서를 작파하고, 대략 내용만 파악해 보는 훑어보기로 독서의 방식을 바꿨습니다. 대중서로 가기 위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는 건데요, 이 책은 대중서도 아니고 비평으로서의 인문서도 아닌, 그 중간에서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쓰지 말자는 반면교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