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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Jun 05. 2024

고전은 읽어봐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북리뷰] 마키아벨리/강정인, 김경희 譯. 군주론. 까치글방. 2014.

1. 미뤄두었던 고전 읽기에 핑계가 생겼다. 


 최근 두 달간 저는 고전을 읽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읽게 되는지 제가 알 바는 아니었으니, 제 개인적인 목적에 천착(穿鑿) 해 봤습니다.

 크게 세 가지 이유였습니다. 우선 무엇이 어떻게 쓰여 있나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목적이었고, 그걸 통해서 간접 학습된 기존 지식을 교정하는 게 두 번째 목표였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정확해진 지식을 ‘뽐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던 듯합니다. 어째 좀 천박해 보이기는 하지만, 솔직하니 속 시원한 답을 얻은 기분입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펼쳐든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치인들의 비열한 행동을 목격할 때마다, 손쉽게 가져다 쓰는 마키아벨리즘이란 표현을 저 역시 즐겨 쓰곤 했는데요, 이게 참 근본 없는 지식이었지 뭡니까. 지금까지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처음 책장을 펼쳤던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요, 내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문학의 기초체력이라 할 수 있는 역사와 철학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고삐리가 이해하기엔 내용 자체가 만만찮습니다. 읽은 곳을 자꾸 반복해서 읽는데도 내용이 모리 속에 정리되지 않으니, 결국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도전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때쯤이었습니다. 6년쯤 시간이 흘렀다고 무지한 고삐리가 현철(賢哲)한 대삐리가 됐을 리는 없습니다. 아주 깔끔하게 내용이 정리되어 확정적으로 기술되었던 참고서나 현대 서적들만 들여다봤으니, 선구자들의 어사무사한 문장들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전공도 아니었고 그렇게 깊은 흥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두 번째 시도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종종 마키아벨리즘이란 표현을 쉽게 사용하게 됐습니다. 『군주론』에서 출발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어느새 있는 그대로보다 더 과장된 듯했습니다. 뭐랄까요, 시뮬라시옹이 일어나서 더욱 그럴듯한 마키아벨리즘이란 시뮬라크르가 형성된 게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든다면 한 번쯤 제대로 읽어볼 때도 되었다 싶었습니다.

 지난해 맥락 없는 고전 읽기를 시작했다가, 금세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고전은 계속 읽어야겠어서 새로운 고전의 독서목록이 필요하던 참이었는데요, ‘교황청 금서목록 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주목했습니다. 웬만한 정치철학 도서들은 죄다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그렇고, 왠지 ‘금서’를 읽는다는 금기 깨기의 매력도 있었던지라 새로운 고전 목록이 얼추 만들어졌습니다. 그 첫 번째 순서가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1559년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작 전부가 교황청 금서목록에 올라갔습니다. 마키아벨리가  이 책을 쓴 것이 1513년, 출간(printed)된 것이 1532년인데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마키아벨리는 교황청에 찍혀서 저작 전부를 금서로 지정했을까도 꽤나 궁금했습니다. 이것 역시 읽어 보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읽어봐야 할 이유는 이렇게나 중첩되고 말았습니다.



2. 이제야 파악하게 된 내용


 이 책은 마키아벨리 시대 이전의 2천 년동안 서양 세계에 통용되었던 ‘현실정치’를 정리하며, 군주(principe)에게 운명(fortuna)에 따른 통치는 지양하고, 역량(virtu)에 의한 통치를 지향하라는 충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통제 가능성이 낮은 외생변수에 취약한 정치 행위는 운명으로, 통제 가능성이 높은 내재변수에 영향을 받는 정치 행위는 역량으로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제가 읽은 까치책방의 역본에서는 그때그때 fortuna와 virtu의 번역이 달라졌는데요, 다행스럽게도 원표현을 병기해 주었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친절한 번역은 확실히 미덕(virtu)입니다. 1994년에 초판 1쇄가 나온 이후, 2014년에 3판 24쇄가 출간될 때까지 부단한 교정이 이루어진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마키아벨리의 고집스러운 용어 사용일 뿐, 다의적인 어휘는 아니었다 싶었습니다. virtu는 ‘미덕’ 그대로의 의미로, 내재변수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어야 비로소 군주로서의 미덕이 성립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마찬가지로 fortuna는 ‘운’ 그대로의 의미로, 군주가 자신의 역량으로 적절히 통제할 수 없는 외생 변수들은 순전히 운에 맡길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처음에 이탈리아어로 집필해서 제목은 ‘Il Principe’입니다. 이탈리아어로 군주를 이르는 말은 re, principe, monarca 등이 있습니다. 라틴어 rex, princeps, monarcha에서 이어졌겠지요. 군주를 라틴어 프린켑스에서 파생된 이탈리아어 프린키페, 프랑스어 프랭스, 영어 프린스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생뚱맞지는 않았습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먼저 읽었을 때에 머리 아프게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현존하는 군주로서의 모나코 대공(Prince de Monaco) 덕에 대공국(Principality)이라는 국체도 주권국(sovereign state)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국가를 이르는 표현도 이탈리아어 stato를 사용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etat, 영어로는 state와 똑같습니다. ‘상태’를 이르는 어휘이기도 하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영토, 주권, 국민을 요소로 성립하는 국가(state)라는 개념이 15세기 대항해시대의 개막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혁명 이후의 19세기에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민족국가(nation)가 발생하기까지 국가 개념을 강화해 왔을 터입니다.

 자유를 의미하는 liberta라는 어휘는 자유 또는 공화국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공화국의 성립에 필요한 ‘시민적 자유’를 강조한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마제국이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 이래, 이탈리아는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로마공화정의 역사적 유산이 있는 이탈리아반도라서 그런지, 여러 공화국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마키아벨리가 이 책을 쓰던 1513년에도 시에나공화국, 피렌체공화국, 제노바공화국, 베네치아공화국이 전국시대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어로 리버럴, 프랑스어로 리베랄로도 읽는 liberale은 ‘virtu del liberale’와 같은 표현으로 ‘관후함의 미덕’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제16장의 제목 <Delle liberalita e della parsimonia>는 ‘관후함과 인색함’으로 번역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다른 저작들은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이 책만큼은 왜 금서목록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겠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 Rodrigo Borgia)와 그의 서자 체자레 보르자(Cesare Borgia)에 대한 가차 없는 기술 때문이겠지요. 알렉산데르 6세의 전횡은 그의 아들 체자레 보르자의 직함만으로도 쉽게 드러납니다. 일단 교황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부터가 맙소사!겠죠. 그런데 이 금쪽같은 아들을 15세에 사제서품도 받지 않고 팜플로나의 주교로 만들고, 교황에 선출되니 18세의 발렌시아 추기경으로 만듭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정치적 야욕을 그대로 품고 이탈리아반도 중부에서 세력을 넓혔습니다. 집권을 위해서는 부당한 수단도 기꺼이 사용하고, 정복 이후의 통치의 안정성을 위해 비정함을 갖추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 역시 이런 체자레 보르자의 행적을 보면서, 모름지기 군주에게 필요한 자세를 이 책으로 정리한 것이고요. 그렇다 보니 ‘마키아벨리즘’이란 용어는 알렉산데르 6세 교황과 그의 아들 체자레 보르자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합니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교황의 전형으로 꼽히는 로드리고 보르자와 체자레 보르자 부자를 열성적으로 찬양하고 있는 이 책을 다른 교황들이 좋게 봐줄 수는 없었겠지요. 금서가 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3. 이래서 마키아벨리즘이란 말이 나왔구나


 마키아벨리즘이란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들은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조언 때문이었으리라 봅니다. 이제 와서 보면, 그렇게까지 잔인할 것도 없고, 대단히 가혹할 것도 없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현대적으로 변용해서 적용하려다 보니, 16세기 이탈리아와는 상황이 달라져서 대학살의 변명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천하의 개새끼’들에게 나쁜 짓을 해도 좋다는 핑곗거리를 만들어주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억울하게도 마키아벨리즘은 그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선은 반대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 비난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악행’을 감행하라고 덧붙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나라를 다시 정복한 경우, 좀처럼 잃지 않게 된다는 것은 상당히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새 지배자는 이전의 반란을 기회로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반역자를 처벌하고, 자신의 통치상의 결점을 고치는 데에 더욱 무자비하고 단호한 처신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18쪽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게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22쪽
 전장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적에게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면, 이제는 군주의 가문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두려워할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군주의 가문을 단절시켜 버리면 두려워할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되는데,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인민들의 신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35쪽
 가급적이면 올바른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말아야 하겠지만, 필요하다면 악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 121쪽 
 악덕 없이는 권력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때에는 그 악덕으로 인해서 악명을 떨치는 것도 개의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 107쪽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생기면 언제나 그 감사의 상호관계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항상 효과적인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실패한 경우가 결코 없습니다. - 114쪽


 물론 방패막이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권력을 쥐고 있으면 언제나 자기 합리화는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안 먹힌다면, 적당한 희생양을 세워서 대신 책임지우면 된다는 기막힌 수도 제공합니다.

 특히나 마지막 문장은 어제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써먹기도 했습니다. 이래서 고전을 읽는다~ 이 말이죠.


 그동안 취해온 엄격한 조치로 인해서 공작 자신이 인민의 미움을 사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반감을 무마시키고 인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제껏 행해진 잔인한 조치는 모두 그가 시킨 일이 아니라 그의 대리인의 잔인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여 어느 날 아침 공작은 두 토막이 난 레미로의 시체를, 형을 집행한 나무토막 및 피 묻은 칼과 함께 체세나 광장에 전시했습니다. - 53쪽
 인간이란 사악하고 당신과 맺은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그들과 맺은 약속에 구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군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항상 둘러댈 수 있습니다. - 119쪽
 군주는 미움을 받는 일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자신이 친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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