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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서영희_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

동기화된 추론을 위한 증거 찾기의 독서

by 안철

서영희, 『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 서울: 사회평론아카데미, 2025.



심리학자 톰 길로비치 Tom Gilovich의 대표적 사회심리학 연구 중 하나는 동기화된 추론 motivated reasoning입니다.

길로비치에 따르면, 우리가 원하는 믿음을 가질 때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 “내가 이걸 믿어도 되는가(can)?”라고 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가능한 최소한의 증거만으로 신념을 정당화하게 만들고, 그 증거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사고를 중단한다는 겁니다. 반대로 원치 않는 결론 앞에서는 “내가 이걸 믿어야만 하는가(must)?”라는 질문이 작동해, 딱 하나의 반례만으로 전체 결론을 거부한다고 설명합니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책, 『바른 마음』을 통해 알게 된 단편적인 지식이지만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저의 행동이 동기화된 추론으로 가득했기 때문이겠지요.


반백 살쯤 되면 조금은 신중해지는 듯합니다. 글을 통해 어떤 주장을 펼칠 때, 웬만해선 사변적으로 도출해 낸 관념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는 편입니다. 되도록 책이나 논문과 같은 문헌을 살펴보는 것으로, 다른 이의 주장을 끌어들입니다. 심리학자 필 테틀록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경향도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남에게 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부터 그것을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폭넓게 여러 견해를 살펴본 뒤에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중립적인 판단’을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앞서 고백했듯이 동기화된 추론에 쉽게 빠지기 때문입니다.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헌이 발견되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살짝 왜곡해서라도 견강부회합니다. ‘나는 학자가 아니며 내 글은 논문이 아니다’라는 너저분한 핑계로 도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동네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처음 접했을 때, 불현듯 떠오른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편의 논문과 <대일본제국헌법>과 <대한국국제>를 살펴보고 글을 썼던 기억이 어렴풋합니다. 이미 3년도 더 지났고, 글을 쓰기 전에도 그랬듯이 그 이후에도 대한제국에 대해 심도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 책을 통해 제가 쓴 글을 정당화할 수 있는 정보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해 볼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딱 필요한 만큼이면 되니, 발췌독을 할 요량이었습니다.

저자가 ‘책머리에’서 밝힌 집필 목적은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대한제국이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규명해 보려는 의도”였다고 밝힙니다. 또한 황제정이 현대 한국 정치에 끼친 영향에 대한 탐색도 아울러 고민했다고 말합니다. 공교롭게도 “이제는 도심의 공원처럼 변해 버린 덕수궁을 찾는 시민들에게 이 책이 대한제국을 알아가는 조그만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드러냈습니다. 3년 전에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 싶습니다만, 올해 초에 출간된 책이니 이런 아쉬움은 빨리 접어 넣는 게 나을 듯합니다.

5쪽
대한제국은 19세기말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근대적 주권국가를 지향하며 탄생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으로 우리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한국인들은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단계부터 일찍이 민주공화제를 채택했고, 해방 후 정부수립 과정에서도 구황실 복원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민족 내부에서 황제정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한국 근대의 역사적 경험이 현대 한국 정치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아닌지 나는 늘 궁금했다. 이 책이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대한제국 황제정이 차지하는 의미를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질문에도 답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저는 대한제국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한제국의 수립에 대한 꽤나 동감하기 어려운 신성화 작업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19세기말 조선국에 있어 가장 필요했던 것은 주권국가(sovereign state)로서의 국격이었다. 청제국(the Great Qing)의 영주국쯤으로 치부되었던 조선이 독립국이자 주권국임을 국제사회에 선언하는 것은 필요했다. 다만 제국(empire)을 거들먹거리는 꼴값까지는 필요 없었다.
청제국이야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었고, 일본제국은 류쿠왕국과 홋카이도를 병합하면서 성립된 실질적으로(in facto) 제국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국경의 변화도 없이, 민족구성의 변동도 없이, 청제국과 같다는 허례를 통해 성립한 대한제국의 시작은 그리 탐탁지 않다. 독립된 주권국가, 그것도 인민주권이 아닌 군주주권일지라도 왕국(kingdom)만으로 충분했다.

저의 이런 판단에 대한 좀 더 유화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 머쓱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자의 판단에 배치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자위해 봅니다.

55쪽~56쪽
만국공법이 상징하는 근대적 국제법체제를 만나면서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하하에서 형성된 황제국 관념은 점차 변화되어 갔다. 일본의 경우에도 막부 말기에 서양 열강과 조우하고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황제국 개념 대신 독립 자주국으로서 제국 개념을 획득해 갔다. 즉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스스로 채택한 제국 개념은 동아시아 전통의 조공책봉체제에서 황제국이 누리는 계서적 개념이 아니라, 단지 천황이 다스리는 ‘황제의 나라’, ‘제왕의 나라’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제국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더 이상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대국의 군주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이처럼 근대 일본에서도 유럽에서 전해진 주권 논리와 동아시아 전통의 황제국 개념이 착종하다가 점차 여러 나라와 대등한 독립국, 보통의 ‘주권국가’를 의미하는 용어로 제국이 사용되었다. 제국이라는 용어에서 기존의 동아시아적 황제국의 개념은 점차 탈락되고, 독립국가의 영역을 넘어선 국제질서의 주재자로서의 계서적 의미가 아닌, 독립적 주권국가를 명시하는 말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쾌재를 외칠 수 있을 만한 주장을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조금 으쓱해집니다.

60쪽

역사계승의식의 맥락에서 본다면 ‘대한’이라는 국호는 조선 후기 이래 삼한전통론의 연장선상에 있고, 아직 단군 중심의 민족개체의식 형성의 단서는 보이지 않는다. 황제 즉위식을 마치고 10월 13일에 내린 반조문에서 단군 기자 이래 각각 분리되어 패권을 다투던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을 고려가 통합하고, 조선왕조에 이르러 북쪽의 말갈, 남쪽의 탐라를 차지해 4천 리 대국이 되었으니 황제국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한 대목에서는 이미 수명을 다해하고 있는 구래의 황제국 개념도 애써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들이 칭제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황제국 개념으로 그러한 반대 여론을 설득하려 한 것이다.



저는 가끔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이 글 괜찮은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10년 전쯤에는 그런 ‘자뻑’이 꽤나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지천명에 다다랐는데 자기 취향을 모를 리도 없거니와, 글은 글쓴이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고, 그렇다 보니 딱 자신의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그 ‘안성맞춤’이 만족스럽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블로그 포스트를 다시 살펴보면서, 또 한 번 ‘이 글 괜찮은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한제국의 성립 과정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변곡점을 놓치지 않았고, 또한 대한제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위해 문헌 조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딱 그만큼만 알고 있는 제가 봤을 때는, 딱 그만큼만 알고 있는 제가 쓴 글이 지식의 한계까지 뻗은 글로 보였을 테니까요.

대한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통해 천명한 전제군주제였는 것이다.
헌법의 기본 요소조차 갖추지 못한 국제는 바이에른헌법이나 메이지헌법에서 보여주는 군주주권적 입헌군주제의 형태조차 띄지 못하고, 그저 전제군주제를 재확인할 뿐이었다. 국민주권적 입헌군주제를 열망했던 이들을 탄압하며 대의기구로서의 중추원마저도 거부한 대한제국의 시대착오성은 아연할 지경이다. 바이에른헌법이 군주주권적 입헌군주제를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계몽군주의 가열찬 국가발전 실행력 때문이었지만, 세도가와 권력을 분점 하며 이렇다 할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이왕가(Yi Dinasty)에 전제군주로서 주권을 일임한다는 것은 여전히 고인 물이 썩어가는 걸 방치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 결과 병탄 9년 만에 설립되는 임시정부는 공화정을 선택하게 됐다.

이와 관련해, 이 책에서도 유사한 맥락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 맛에 책을 뒤져보는 것이겠지요.

112쪽
개정 관제가 시행되기도 전에 독립협회 체포령과 함께 인민협회 조항은 삭제되었다. 고종은 그동안 유화적인 태도를 바꾸어 민회 해산령을 내리고 12월 23일,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고종의 태도 변화에는 독립협회가 고종황제를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를 도모하고 있다는 ‘익명서 사건’과 12월 16일 중추원에서 정부대신에 합당한 인물로 박영효를 선출한 데 대한 분노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효과 일본에 망명해 있는 상태에서도 국내에 측근 세력들을 잠입시켜 독립협회의 반정부운동을 지원하고 은밀히 정계 복귀를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 고종의 심기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독립협회에 반대하는 유생들로 독립협회의 정체관이 공화제라고 주장하면서 독립협회가 ‘구미의 공화제로 우리나라의 군주전체정체를 바꾸려 한다’라고 비판했다. 의정부 찬정 최익현도 독립협회는 외궁의 ‘民選’, ‘民主’의 예를 본받으려는 ‘民黨’이라고 공격했다.
독립협회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고종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황제정의 법적 토대를 확실히 하고자 「大韓國國制」를 제정했다. 「대한국국제」는 대한제국의 政體와 軍權의 소재를 명백히 밝히는 國制를 제정하라는 조칙에 따라 1899년 6월 23일 설치된 법규교정소에서 작성했고, 황제의 재가를 받아 8월 17일 반포되었다.
118쪽
황제권이 절대 군권으로 선언되었을 뿐, 천부인권이나 주권재민의 이념, 독립협회가 주장해 온 입헌정체의 수립이나 의회 개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공법을 참고했고, 외국인들의 동의 여부를 신경 쓰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나 삼권분립에 관한 조항도 없었다. 공법은 입법·행정·외교 등 모든 권한이 황제권에 속함을 표현하는 데 수식어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한국국제」는 주권의 소재를 밝혔다는 점에서 헌법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그 명칭이 헌법이 아니라 ‘국제’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국가제도를 명확히 한다는 취지로 작성된 것이다.



애초에 통독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에필로그를 살펴보는 것으로 독서를 마쳤습니다.

전반적으로 저의 견해를 지지할 수 있는 진술들로 가득했습니다. 혼자 뿌듯해하면서, 쓸데없지만 자존감도 조금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사정이 이러니, 내년 초쯤에 이 책을 다시 한번 정독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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