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물린 재갈을 풀고,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빛처럼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가, 각자의 프리즘을 통해 다들 자기 나름대로 분절합니다. 누군가는 좌파적 견해를 더 크게 분광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우파적 견해를 더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이, 하나의 색만 드러내진 않는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저는 보수주의자일 수 없는 진보주의자이며, 민족주의를 배격하는 국제주의자이면서,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진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개혁주의자이며, 불간섭을 배격하는 규제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엄벌주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교정주의자입니다. ‘8 value’로 단순화하자면, 시장보다는 평등 지향, 국가보다는 국제 지향, 권위보다는 자유 지향, 전통보다는 진보 지향입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단순화하자면 ‘좌파 빨갱이’임을 부정할 순 없을 터입니다.
대부분의 글에서 쓸데없이 서론이 긴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아주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할 능력이 없거나, 개소리 bullshit을 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대체로 전자의 경우는 후자가 되기에, 결국 ‘개소리를 하려니 혓바닥이 길어지는 것’이겠지요.
저는 ‘가짜 좌파’ 또는 ‘패션 좌파’란 비판에 ‘긁히면서도’, 제 안에 뿌리 깊은 미소지니를 불식하지 못하고 때때로 안티페미니즘의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페미니즘 진영 일단에서 보여주는 과격주의의 몇몇 구호에서 비합리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에 본질적인 반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미 교조화된 구호들은 ‘가부장제’에 대한 공격에서 ‘남성’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된 지 10년쯤 됐습니다. 과녁은 남성 일반이 아니라고 강변해 오긴 했지만, 이들에 대해 차분하면서도 대오를 갖춘 대응 논리를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공부가 부족하니 악순환이 계속되었고, 그러니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인 것이었죠. 유사한 기제로 오래 속앓이를 해왔던 ‘피해자성 담론’은 릴리 출리아라키의 책이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으나, 이 사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사이다가 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이 책을 만났습니다. 앞선 경험처럼 답답함이 뻥 뚫리지는 않았지만, 고민의 출발선 정도는 제공해 준 것 같아 꽤 반가웠습니다.
16쪽
나는 이 책을 쓰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쓰지 말라고 충고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작금의 정치적 분위기에 소년과 남자들의 문제를 들추어내는 것은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저자가 서문에 밝혔다시피, 쉽지 않은 일이고, 그래서 참 미진합니다.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얼룩이가 ‘제3지대’를 말해야 하는데, 그러면 양극화된 사회에선 회색분자로 몰릴 뿐이라서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제4부 ‘남성을 위한 정치는 없다 Political Stalemate’에서, 제8장 ‘외면하는 진보 Progressive Blindness’와 제9장 ‘화만 내는 보수 Seeing Red’를 통해 줄기차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좌파의 ‘유해한 남성성 toxic masculinity’ 타령은 소년들을 온라인 마노스피어 manosphere로 보내 버린다고 비판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의 접근 방식도 마찬가지로 현실을 보지 않고 시간을 되돌릴 궁리만 한다고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책을 왜 지금 펴낸 여섯 가지 큼직한 이유”를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내 생각보다 상황이 더 나빠서다. 교실과 캠퍼스에서 고군분투하는 소년들, 노동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어 가는 남자들, 자녀들과 연락이 끊기는 아버지들에 관한 헤드라인을 나는 더러 알고 있었다. 그중 얼마쯤은 과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태는 더 암울했다.
두 번째, 특히 계급과 인종 같은 또 다른 불평등의 끝에 내몰린 소년과 남자들이 가장 아등바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소년과 남자들은 경제적·사회적 사다리의 저 아래에 있는 이들이다. 대다수 남자는 엘리트 축에 끼지 못하며, 그런 자리를 차지할 운명의 소년은 더욱더 적다.
세 번째, 소년과 남자들 문제의 본질은 개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라는 사실이, 그런데도 그런 관점에서 다루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네 번째, 정부가 벌이는 사업들을 위시해 여러 사회정책이 소년과 남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섹스와 젠더의 문제에 관한 정치적 교착 상태 때문이다. 양측은 진정한 변화를 가로막는 이념의 입장으로 파고들었다. 진보파는 중요한 성 불평등이 양방향으로 달릴 수 있음을 발아들이지 않고, 남성 문제를 재빨리 ‘유해한 남성성 toxic masculinity’의 증상으로 치부한다. 보수파는 소년과 남자들의 어려움에 더 민감해 보이지만, 시간을 되돌려 전통적인 남녀 역할을 회복하기 위한 명분으로만 사용한다.
여섯 번째, 나는 정책을 연구하는 전문가 wonk로서, 이 문제들을 그저 애통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몇 가지 긍정적 아이디어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1부에서는 ‘남성들의 불안 Male Malaise’에 대해 다루는데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원인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발생하게 되는 불안’을 다룹니다.
제1장 ‘소녀들이 지배한다 Girls Rule’를 살펴보면, “전 세계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을 앞서고 있”으며, “OECD 국가에서 여학생의 독해 능력은 남학생보다 1년 정도 앞서고 있어서, 남학생의 우위가 거의 사라지고 있는 수학과는 대조를 이룬다”라고 현실을 제기합니다. 이런 차이의 발생하는 이유로 전전두피질 prefrontal cortex의 성장은 약 2년, 소뇌의 성장은 약 4년 정도의 차이가 나기 때문으로 짐작합니다.
제2장 ‘워킹맨의 우울 Working Man Blues’에서는 남성 고용이 감소에 대해 설명합니다. “남성 일자리는 자동화와 자유무역이라는 원투펀치를 얻어맞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자동화되기 쉬운 직업일수록 남자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고, 남자들은 자동화의 세계가 요구하는 기술이 모자라기 일쑤”라서 그렇다고 부연합니다. 여기에 “중국산 제품 수입이 미국 제조업 일자리 약 200만 개에서 300만 개를 줄여 버렸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도 덧붙입니다. 그런데 “자유무역에서 생기는 이득이 패자에게 어느 정도 재분배될 것이라는 정책 서클”은 평생 학습 같은 쉰소리가 전부라 틀려먹었다고 지적합니다.
성별 임금 격차의 현실 또한 조명합니다. “정규직 여성 근로자는 일반 남성 급여의 약 82퍼센트”를 받지만 “여자들이 같은 일을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서도 남자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라고 단언합니다. “하는 일의 종류가 다르거나, 일의 방식이 다르거나, 혹은 둘 다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보수를 적게 받는 것”이라는 거죠. 이에 대한 예로 ‘매사추세츠만 교통공사 MBTA’ 근로자의 사례를 가져옵니다. 쉽게 말해 “아버지 기관사들은 훨씬 더 많은 초과근무 수당을 원했고, 어머니 기관사들은 더 많은 휴가를 원했다”는 거죠. 물론 여기서 외면할 수 없는 사실도 콕 집어냅니다.
64쪽
대체로 여자들에게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돌멩이로 한 대 얻어맞는 것과 다름없다. 반대로 남자들에게는 대체로 흔적조차 안 남는다.
제3장 ‘소외감을 느끼는 아빠들 Dislocated Dads’에서는 전통적 가족 제도와 현실의 괴리를 짚어냅니다.
전통적 가족 개념에서 아버지는 생계유지를, 어머니는 양육을 책임진다는 개념은 진화인류학책을 통해서 살펴보면, 그저 개소리에 불과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 사회에선 그와 같은 ‘신화’가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현재 미국에서 여성이 주로 생계를 책임지는 가정은 41퍼센트 정도”지만, 사회적 규범은 바뀌지 않아서, 문화지체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족 부양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남자들이야말로 바로 그 전통적 잣대로 판단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라는 지위는 다른 무엇보다 성숙한 남성성을 형성하는 근원적 사회 제도”인데, 이게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니, “길을 잃은 기분”으로 “엉망진창이기 일쑤”인 것이라 설명합니다.
이 와중에도 “여성운동의 성공이 남성의 사회적 정체성을 위태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아슬아슬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저자는 상황을 호도해선 안 된다고 단언합니다.
제2부 ‘이중의 굴레 Double Dissadvantage’에서는 좀 더 원인이 파악되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제4장 ‘트와이트는 왜 안경을 쓸까 Dwight's Glasses’에서는 흑인 남성이 이중으로 겪게 되는 불이익을 드러냅니다. “초등학교, 중등학교, 고등학교 전 과정에 걸쳐서 흑인 남성들은 흑인 여성에게도 백인 남성에게도 모두 뒤처져 있다”라고 하는데, 이는 “더 적은 학력으로 무장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셈”이라서, “노동시장의 여러 부분에서 차별당할 위험이 더 클 뿐만 아니라, 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비율도 더 높”아지는 이유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는 줄어들고 있건만, 인종 격차는 더 커지고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흑인 남성은 위험하다”는 편견도 작용합니다.
제5장 ‘유리 천장보다 계급 천장 Class Ceiling’에서는 여성의 세 배에 이르는 남성의 절망사 Deaths of depair나, 19퍼센트 포인트 줄어든 성별 임금 격차에 비해 12퍼센트 포인트 확대된 계급별 임금 격차를 지적합니다.
제6장 ‘응답 없는 사람들 Non-Responders’에서는 남자들의 의욕 저하를 조망합니다. 정부의 학비 보조금 정책이나 직업훈련이 남성들에게 효과가 없다는 겁니다. 그에 비해 여자들에겐 효과가 나오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그 이유를 찾고 있지만 당최 알 수가 없다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합니다.
남자란 테스토스테론 덩어리이고 그로 인해 공격적인 성향이 강해집니다. 여기에 성욕도 높은데, 짝을 얻기 위해서 엄청난 위험까지 기꺼이 감수하게 된다는 거죠. 그게 남자라는 겁니다. 다만, 호르몬에 지배당하는 괴물인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177쪽
소년은 남자가 된다. 심지어 신사가 된다. 그 소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다만 더는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을 뿐이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다 보니 고민이 깊어지는 터라, 대체로 무슨 방법을 써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감 잡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책을 논하지만, 공론장에 섶을 지고 뛰어드는 꼴밖에 되지 않더군요. 이 책도 그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집니다.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가는 ‘레드셔팅 redshirting’(Redshirt the Boys)이나 health, education, administration, literacy 분야에 남성 지원자를 늘이는 정책(Men Can HEAL)을 만든다거나, 시대 현실에 부합하는 새로운 아버지상을 정립(New Dads)하는 것은 그 무엇 하나 ‘비현실’적이란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란 거죠.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 투성이 제안일지라도, 그 출발선에서 찬찬히 고민해 보다 보면, 더 나은 받을 찾을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