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책갈피로 쓰던 시절이 있었다.
1994년에 1판 1쇄가 인쇄되고, 2001년에는 1판 34쇄가 발행된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구입했던 게 이 맘때였다. 이 책으로 경제학사 스터디를 했었는데, 내가 멜서스 파트를 담당했었던 모양이다. '34쇄까지 찍어낼 정도'라고 놀랐다가, 그 당시의 베스트셀러 규모를 생각해 보곤 다시 아연한 구석이 생긴다.
베이비복스가 1999년에 발표했던 4집을 워낙 좋아했기에, 이들 5인조 스냅사진을 책갈피로 썼던 모양이다. 90년대에는 이런 식의 연애인 스냅사진이 문구점에서 팔렸다. 심지어 광화문교보 핫트랙스에서도 팔았었다.
20년만에 발굴해낸 이 사진 때문에 지금까지 쓰던 서울식물원의 티켓이나 국립현대미술관 티켓이 작년 봄 사진과 임무를 교대할 듯싶다.
1999년 3월에 초판을 발행하고 2001년 7월에 7쇄를 발행한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은 문학전공자들이라면 한 질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4년 2월 사려니숲길에서 찍은 산수국 사진을 집에서 인화했나 보다. DSLR로 찍은 태생부터 디지털 파일이었던 이미지를 마침 그때 가게를 정리하고 남아있던 사진 프린터기로 뽑아냈으리라.
지금이야 사진을 보자마자 산수국이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이 되었지만, 8년 전엔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꽃에 무지했었다.
황정은의 에세이집, 《일기日記》(창비, 2021)을 읽었다.
요즘 내가 주목하는 주제가 그래서인지, <민요상 책꽂이>의 여러 문장들이 눈에 띄였다.
무엇보다 독서를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소소한 습관들과 취향의 문제가 굿즈라는 BM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황정은 작가도 40대 중반답게, 꽤나 꼰대스러운 자잘한 습관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면은 나와 통하기도 하고, 어떤 면은 반대가 되기도 한다. 동시대인들의 어쩔 수 없는 동질감이 재밌긴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티켓을 쉽게 책갈피로 쓰곤 한다. 너무 얇아서 책갈피가 되지 않을 지경도 아니고, 너무 두꺼워서 책이 제본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준의 부피감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서 꽤 좋아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플래그를 붙여서 다니기가 좋다. 황정은 선생과는 달리, 서울식물원 주제원 입장권도 꽤나 오랫동안 책갈피로 쓰고 있다. 으아리속의 꽃이 프린트된 게 너무 예뻐서 말이다.
지난 11월 서울서점주간에 줏어온 책갈피는 집에서 사용하고 있다. 누워서 책을 보다가 잠깐 덮어야 할 때 사용한다. 두께감이 느껴지고 이물감이 커서 평상시엔 잘 쓰지 않는데, 잠깐씩 쓰기엔 좋다. 보던 면을 펼친 채로 바닥에 내려놓는 게 꽤나 꺼림칙하다 보니 잠깐씩 사용하게 된다.
가름끈이 있는 형태는 나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거치적거려서 그렇다.
지난 해 찍어 두었던 필름을 좀 더 나은 화질로 스캔해서 출력했다.
4년쯤 쉬었던 필름 사진을 다시 시작한 지 5년만에 처음으로 인화를 해 본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필름으로 찍은 사진이 인화되는 건 9년만의 일이다. 유난스럽게 일찍 찾아와 찬란했던 지난 봄을 책갈피로 쓸 요량이었다.
그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필름 값은 4배쯤 뛰었고, 더 이상 필름 자체를 인화하는 기계는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필름을 스캔하고, 그 스캔한 디지털 파일을 인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낭패다.
심지어 현상방식마저도 바뀐 듯하다. 필름회사와 필름 종류에 따라 사용하던 현상액이 죄다 달랐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필름마다 특유의 발색을 보여주곤 했는데, 그런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필름 종류는 커녕, 필름 회사간의 차이까지도 잘 드러나지 않게 됐다. 아쉬움이 크다.
사진이나 엽서는 책갈피로 쓰기엔 좀 큰 편이다. 한 손에 가볍게 쥐고 있다가, 착 하고 끼워넣은 다음, 팍 하고 책을 덮기엔 맞춤하지 않다.
심지어 책등에 물리지 못해서 흘러내릴 때도 있다. 낭패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사진이 엽서보다 나은 점은 좀 더 얇아서 제법 잘 물려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