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읽어야 하는 것이지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 욕심이 없진 않다.
서가에 꽂아 두고, 글을 쓸 때 가끔씩 꺼내어 인용하는 걸 즐기는 편이라서 그렇다. 그렇다 보니 바로 읽을 요량으로만 책을 구입하게 되는데, 그래서 구입하게 되는 책에 대해서는 꽤나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물론 모든 책에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미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은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노벨문학상, 공쿠르상, 퓰리처상, 부커상, 아쿠타가와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한 소설들을 덮어놓고 사는 경우가 잦다. 취향을 거스를 만큼 결이 맞지 않는 글을 만나는 일도 왠만해선 일어나지 않는다. 상 자체의 권위가 보수적인 평가의 누적을 기초하는 만큼, 그 보수성에 기대어 보면 터무니없는 작품을 만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간혹 아쿠타가와상이 다소 파격적인 선택을 하곤 하는데, 그 파격이 글 자체에서라기보다는 문학계의 관행에 대한 것이라서 그리 거추장스럽지는 않다.
전작으로 검증된 작가의 신작도 까다로운 검증 절차 없이 구매하곤 하는데, 그러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없진 않았다. 아무리 좋은 작가라도 매번 훌륭한 작품만 나오는 건 아니라서 말이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인 경우도 없진 않아서, 언제서부턴가는 도서관에서 먼저 빌려보는 습관이 생겼다.
막연한 호감으로 책을 사는 경우도 있다. 지인이 쓴 책이라던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지명이라도 제목에 붙으라치면 덥석 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책은 엄격하게 살펴보고 사는 편이다.
일단 책을 찬찬히 살펴보는 방법으로 도서관 대출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서점에 쭈그리고 앉아 찬찬히 책을 둘러보기엔 우리나라 서점들의 상황이 받쳐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코로나 팬데믹으로 있는 공간마저도 철수한 상황이라서 말이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소규모 동네서점의 경우에는 '그 한 권'이 팔아야 하는 상품이라서 더더욱이나 힘들다. 결국 책을 찬찬히 살펴보려면, 도서관 대출이 가장 빠른 답이 된다. 2000년대 중반부터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한 공공도서관의 장서량은 우리의 독서생활에도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다만, 신서의 경우에는 꽤나 높은 경쟁률을 보이기 때문에 꽤나 긴 대기열을 감내해야 한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참아낼 수 없을 정도로 조바심이 난다면, 결국 서점에서 짧은 시간을 들여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머리말과 목차를 꼼꼼히 살펴보고 가장 궁금해했던 부분을 찾아 정독해 본다. 그 과정을 거쳐서, '이쯤이면 찬찬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싶을 때에 비로소 계산대로 향한다.
나는 지적 허영도 심한 편이다.
그 허영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자주 사용하고,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책"으로도 제법 활용한다.
2010년 8월 교보생명 광화문빌딩에 이런 문구가 걸렸다.
"괴테의 명언 변용"이라고 밝혔지만, 언제부턴가 인터넷에서는 괴테가 한 말로 철썩같이 믿고, 출처도 알 수 없는 말을 재생산하고 있다. 지적 허영이 심한 편인 나로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다.
아무려나,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는 말에는 제법 동감하는 편이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허영을 표출했던 나는, 다른 사람이 펼쳐든 책으로 그를 평가하곤 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으로는 안 된다. '심지어 나는 이런 책을 사들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우쭐대려면 반드시 내가 산 책이어야만 한다. 책의 배에 호와 이름을 한자로 써넣은 정도의 호기는 필수다.
언젠가 인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한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사양이 들어오는 출입문에 기대어 책을 펼쳐든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더 눈길을 끌었던 것은 책을 종이로 싸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 국민학교 다닐 때 달력종이로 책을 쌌던 것처럼 말이다. 너무 소중한 책이라서 흠집이라도 날까 포장했을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무슨 책을 읽기에 그게 부끄러워 숨기나"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마침 나 역시 『친절한 트렌드 뒷담화 2022』를 펼쳐 들고 있던 터라, 그리 자랑스럽지는 못했던 탓이 컸으리라. 모름지기 전철 안과 같은 공간에서는 좀 더 폼나는 책을 펼쳐들어야 나의 허영이 충족됐을 테니 말이다.
그나마 신도림역 환승통로 계단을 내려오면서, '빌린 책'이라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출퇴근길에 들고 다니면서도 깔끔하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영덩어리치곤 제법 상식적인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20대와 30대 초반에는 북리뷰를 꽤나 열심히 썼다. 길게 쓴 책도 있고 그저 간단히 몇줄 적은 것들도 있다. 2005년 네이버 블로그를 사용한 이후로는 단 한 줄의 리뷰조차도 여전히 남아 있어 가끔씩 들여다 보기도 한다. "그땐 어려서 뭘 좀 모르고, 그냥 글을 막 싸지르던 때"로 폄하해왔던 시기이기도 한데, 지금 다시 읽어봐도 그리 엉터리 글은 아닌 경우가 잦아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고' 발전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리뷰를 쓴다는 것은 그 정도로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물론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글을 쓰는 경우가 없진 않다. 잡지 에디터 시절에는 출판사에서 보내준 보도자료를 대충 싸집기 해서 서평을 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숱한 기자와 에디터들이 그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일이 아닌 취미로서의 글쓰기인 리뷰에는 꽤나 열심이었던 독서의 결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부분 부분의 정확한 내용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까지 이해야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리뷰가 나오기 어렵다.
책을 열심히 읽고, 그 내용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숱한 플래그를 끼워 넣어야 한다. 물론 3M의 플래그가 지저분하다며 질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책에 밑줄 긋는 것'을 좀 신성시하더란 말이다. 우리 플래그파는 정반대다. 책에 지저분하게 밑줄을 긋는 것부터가 '책에 대한 폭력적 행위'라고 보고 있다.
여튼간에 책에 밑줄이라도 그어볼라치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간혹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으로 "나님이 여기까지 책을 읽었다"며 허영을 떨기도 하는데, 그것만큼 꼴불견도 없다. 뭐랄까, 남의 슈퍼카 앞에서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는 것처럼 볼품없달까? 그래서 책을 읽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책을 구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남자 분이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마침내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자신은 책을 절대 안 산다구요.
요즘 도서관에 책이 얼마나 많은지를 설명하더니 자신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서점'에서 힘주어 강조하시더군요.
노명우, 『이러다 잘 될지도 몰라, 니은서점』. 서울:2020. (주)출판사 클. p.141
니은서점(https://www.instagram.com/book_shop_nieun/)의 마스터북텐더 노명우는 이를 계기로 '책을 사면 좋을 이유에 관한 아주 설득력 있는 '썰'을 만들었는데'라고 책을 썼다. 노명우의 썰 역시 첫째로는 책에 독서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점과 둘째로는 작가에게 인세가 지급된다는 점 셋째로는 자기현시기능을 꼽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관한 에피소드를 인용하려 펼쳐든 『이러다 잘 될지도 몰라, 니은서점』을 한참을 읽고 있었다. 다시 읽어도 이 책은 참 재밌다. 구입해서 서가에 꽂아놓으니 이렇게 다시 책장을 넘겨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간혹 팔로하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 '동네책방 영주(https://www.instagram.com/book_youngjoo/)' 에는 어떤 글들의 첫 문장이 올라오곤 한다. 그 글이려나 싶다가도 이내 잊어버리곤 했다. 확인할 수 있는 책이 내 서가에 꽂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읽었으나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그리하여 피에르 바야르가 지적한 비독서 상태에 빠질 때의 분함은 꽤 크다.
그런데 사흘전에 올라온 이태준의 「달밤」이나, 어제 올라온 이상의 「권태」같은 글들은 금새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1997년 하서출판사에서 발행간 하서명작선 7번과 같은 해 초판 3쇄가 발행된 두산동아의 한국소설문학대계 20이 서가에 꽂혀 있었던 덕이다. 오래된 책을 들춰보면서 '추억의 물건'들이 깜짝 방문하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도 꽤나 재밌는 경험이다.
1999년 11월 19일 초판 1쇄가 발행된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 국립국어원은 독일 태생의 미국인으로 취급해서 한나 아렌트가 아니라 해나 아렌트로 용례를 제공하고 있다.)의 책, 『폭력의 세기』를 처음 읽었던 건 2004년 4월이었다. 관악구립도서관에서 대출했던 기록이 남아 있는 걸로 봐선 그렇다. 절판된 이 책은 더 이상 관악구립도서관에서 대출해 볼 수가 없다. 장서목록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달포 전쯤이었을 테다. 갑작스레 이 책이 궁금해 구립도서관을 검색해보니 책이 없었고, 자주 가는 동네서점인 '그날이오면'에도 이 오래된 책의 재고는 없었다. 교보문고에서조차 절판 정보만 확인할 수 있었고, 알라딘중고매장에서 취급하는 중고책도 없었다.
이 책을 이젠 못 보겠구나 싶었는데, 우연한 걸음으로 찾아간 용산도서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 조금은 기뻤다. 1968년 민주공화당 중앙당사로 준공된 건물을 지금은 서울특별시교육청 용산도서관으로 쓰고 있다. 박정희 사후 신군부에 의해 1980년 민주공화당이 해산하면서, 그 건물을 서울시가 매입해 도서관으로 만든 것이다. 후암동 나들이를 나갔던 터라, 혹시나 있을까 싶어 들러보았다. 보존서고에서 이런 모양으로 있던 책을 2+1주 기한으로 대출해왔다.
만약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사놓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20년전만 해도, 출판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나였기에 어떤 책이 절판이 되어 구해볼 수 없는 책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놓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쉬이 들지 않았던 터다.
결국 책은 읽고 또 읽자고 사는 것이다. 아직 다 읽지 못하고 책장에 박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자니, 자신있게 할 말은 아니다 싶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들쳐보지 않은 것도 아니라서, 제법 뻔뻔해질 수도 있다.
어제 저녁 조치원 읍내 허름한 치킨집에서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플래그를 붙여둔 페이지를 그에게 읽혔다.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부정하고 상대편을 악마화하는 성찰 불가능성. 이러한 문제는 지금의 일베가 나타날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을 제공했다"는 문장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친구녀석은 이렇게 되물었다.
"왜 책을 사서 봐?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되잖아?"
이 질책같은 질문에 지금까지 썼던 이유들을 구구절절히 설명할 수도 있었을 테다. 내 책이니까 플래그를 붙이면서 볼 수도 있고, 막 가지고 다니면서 자랑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뱃속에 들어찬 생맥주는 취기를 불러일으켰고, 나는 친구에게 꽤나 동의하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산 거 아니야. 동네서점 바로대출제로 빌린 거야."
물론 덕지 덕지 플래그가 붙인 이 책은 반납하지 않고 구입할 예정이다. 4월부터 바로대출제로 신청해 읽어보고 그 책을 구입한 것이 네 권이다. 이제 다섯 권째가 될 테다. 1인 1개월 6권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보니, 읽어 본 뒤 한숨을 쉬며 그냥 반납한 책은 더 많다는 뜻이다.
책을 사서 소유하게 됐을 때의 장점은 참 많다. 하지만 그 전에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읽지도 않을 책을 사서 쌓아두는 것은 읽었다고 자랑하는 것보다 더 꼴불견이다. 그렇다 보니 자신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던 남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걸 굳이 서점에 와서 역설하는 무신경함에는 꽤나 질릴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책은 읽어야 하는 것이지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