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2020. 리얼북스. "남의 책방 살짝 엿보기"
전자책 구독서비스 플랫폼인 '밀리의 서재'에서는 MZ세대의 독서행태로 "완독의 경험을 갖추되,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유형이 자리잡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두어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텍스트 분량으로 '책 한 권'을 엮어내는 것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고도 봤다. 이는 평량과 볼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종이책의 '물성'과는 다르게, 스마트폰으로 수렴하기 시작한 전자책 디바이스의 '물성'에서 구현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정형성에 기대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이책들 중에서는 낮은 평량과 낮은 볼륨의 종이를 사용해서 일부러 얇아 보이는 책을 만들 수도 있고, 높은 평량과 높은 볼륨으로 '벽돌책'을 만들 수도 있다. 단숨에 훅 읽을 수 있다고 독자를 유혹하고 싶다면 앞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반대로 '벽돌책'들은 그 두께와 무게만으로 근거없는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대중서가 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전문서라 하기에도 어려운 책들이 그런 맹점을 파고들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낮은 평량과 높은 볼륨을 사용하는 전략도 간혹 쓰인다. 저 두꺼운 책을 다 읽어냈다는 성취감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350페이지쯤의 도서에서 일부러 볼륨을 키우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너무 분량이 많은 책들은 종종 독자의 접근을 막게 되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당신은 그 두꺼운 책을 읽어낼 정도로 훌륭한 독서가"라 치켜세울 수 있게 뻥튀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때론 책 한 권을 엮어내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텍스트들도 있다. 사진이나 삽화를 때려 넣어도 어떻게 해결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세상에 없던 판형으로 줄이고, 폰트의 포인트를 키우고, 자간과 장평을 늘이며, 페이지의 여백을 늘리는 방식으로 아무리 편집을 해 봐도 빈약해 보일 때가 있다. 이때는 높은 평량과 낮은 볼륨의 종이를 사용하는 듯하다. 종이를 통해 무게감을 갖추지만, 낮은 볼륨으로 '후딱 읽고 치우라'는 유혹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퇴근 후 동네 책방』,『퇴근 후, 독립출판』,『퇴근 후, 책방여행』을 출간한 리얼북스의 전략은 얇고 가벼운 책을 후딱 읽어낼 수 있는 독서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책 읽는 속도가 제법 느린 편이다. 어릴적 두 살 터울의 누나들과 함께 책을 읽을라치면 언제나 마지막 순번이어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심지어는 만화책 읽는 속도도 느려서, 친구들에게 지청구를 듣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내가 이연주의 『퇴근 후, 책방여행』은 신림선 서울대벤처타운역에서 영등포역까지의 30분간 그리고 조치원역에서 영등포역까지의 1시간 20분을 사용해 다 읽을 수 있었다. 구선아의 『퇴근 후 동네 책방』은 게으름을 어떻게 좀 해보려고 한 달을 결제해 놓은 단지내 스터디카페에서 한 시간가웃에 마지막 장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책 읽는 시간이 느린 편인 내가 그 정도인 편이라면, 책 좀 빨리 읽는다 싶은 사람들은 1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무크에서부터 에세이의 주변에 존재하는 잡문들에 이르기까지, 얇고 그래서 간결하고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요사이 자주 접하게 된 듯하다. 작년 추석에 전자책으로 접했던 제이슨 솅커의 『코로나 이후의 세계』처럼, 반나절이면 읽을 수 있는 대중서들이 점점 늘어나는 듯하다. ESG에 대해 심도 깊은 탐색 이전에 맛보기용으로 들춰보았던 한국경제신문의『한경무크 ESG K-기업 서바이벌 플랜』도 꽤나 만족스런 독서경험을 가져갈 수 있었다. 일본 겐코샤의 무크지, 『도쿄의 서점』은 무크에 대한 기존 태도에 대대적인 반성을 불러올 정도였다. 얼마나 집중력 있게 대상을 기술하냐에 따라서, 짧고 뻔한 글들도 강력한 독서경험을 제공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요즘 내가 쓴 리뷰들을 보면 왜 그렇게 까는 글 일색인가 싶기도 한데, 이연주의 『퇴근 후, 책방여행』은 도무지 칭찬이 나오진 않는 책이다. 책방에 대한 나이브한 생각을 클리셰로 가득한 문장으로 풀어나가서, 읽고 나면 내가 뭘 읽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할 지경이다. 문장들이 크리넥스 티슈처럼 가벼워서 쉽게 휘발한다. 열 해가웃 전에 잡지사에서 에디터 로 일할 때 영혼없이 '빨아주는' 기사를 쓰면서 이런 글들을 썼었다. 작가의 관점은 진중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심지어 글의 대상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어서 피상적이고 파편적인 호평으로 일관하게 되며, 종국에는 문학성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진부한 표현의 지리한 문장들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부끄러운 나의 지난날을 억세게도 잡아당기는 책이었다. 거기에 제목도 잘못 붙었다. 퇴근 후엔 어림도 없고, 어떻게 날이라도 잡지 않으면 가볼 수 없는 위치의 책방들이 부지기수다. 그리하여 앞으로 읽게 될 구선아의 <퇴근 후, 동네 책방>에 대한 기대감이 바닥을 기게 만들었다. 같은 리얼북스에서 출간했을 뿐만 아니라, 두 책을 세트로 묶기까진 한 탓이 컸다.
『퇴근 후 동네 책방』은 서울 마포구 서교동(법정동)의 동네서점인 '책방 연희'의 구선아 점주의 글로, 앞에 책과 세트로 묶이기엔 좀 억울할 수 있는 책이다.
책을 출판한 리얼북스가 제목에 '퇴근 후'란 문구를 넣어 시그니처 브랜딩한 시리즈 기획의 시초인 모양이다. 앞서 읽은 책때문에 신뢰감이 팍 떨어진 터라, 별 기대없이 책방을 펼쳤다. 우려보다는 준수한 책이었다. 워낙 기대치가 낮아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앞선 책보다는 각 책방에 대해 높은 집중력을 보여준다. 책방 운영자이기도 한 작가가 남의 책방에서 벤치마킹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떠난 '퇴근 후 마실'이니 오죽했을까.
판권면 바로 앞에 놓여진 2페이지의 '동네 책방 사용 안내서'도 유심히 들여다 볼만하다. 언젠가 비슷한 내용으로 서울형책방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도 등장했던 '#동네책방사용설명서'의 원전이 아니었나 싶다.
'퇴근 후' 시리즈가 갖추고 있는 미덕인 간단함은 『퇴근 후, 독립출판』에서도 나타난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가이드북으로서는 큰 장점이다. 출판에 대해 1도 알지 못하는 초짜들에게 길게 설명해봐야 의미가 없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만큼의 기초지식을 단단한 디딤돌이 될 수 있게 제공해주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독립출판'이란 모호한 개념을 걷어 내면, 무척 깔끔한 자가출판(self-publishing) 가이드북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은 독립출판에 대한 책은 아니다. 1장에서 정리된 독립출판의 개념은 몹시 피상적이며, 존재한다 믿는 것으로 자명해지는 일종의 신앙적 개념 접근도 여전하다. 그저 한숨만 나오게 된다. 몇몇 서점에서 정리한 개념과 독립출판에 대한 국내 논문 10여 편 그리고 몇 권의 책을 읽으며 내린 결론은 "한국 사회에서 독립출판이란 내 여자친구와 같은 것"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 여자친구의 근원적인 특질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란 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독립출판에 대한 나의 관심이 꽤 높았다. '독립(independent)'라는 어휘가 갖는 진보성(progressiveness)에 꽤나 꽂혀서일 테다. 정작 독립출판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독립출판'의 허위성(falsehood)이 드러날 뿐이라서 당혹스럽다는 건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