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큐레이션에 대한 단상1
2022 경기서점학교의 심화과정으로 ‘거점서점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됐는데, 수원의 서점 <마그 앤 그래>에서 이틀동안 이루어진다. 서울에 사는 나도 수업을 듣고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기콘텐츠진흥원에 고마운 마음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과정에 대해서는 꽤나 볼멘소리를 높이긴 했는데, 좋은 건 좋은 것이고 아닌 건 아닌 것이라서 그렇다.
여하튼 프로그램 2차일의 계획은 ‘북큐레이션 실습’쯤으로 잡힌 듯하다. 개설된 밴드에서 공지되길 “‘북큐레이션’ 실습이랄까, 직접 큐레이션을 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전달됐기 때문이다.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투표를 했는데, 결과는 예상치 못했던 “겨울, 계절 맞이 추천 책”이 되고 말았다.
막막했다.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라서 그렇다. 대뜸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밖에 없었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니가타현 유자와 온천을 배경으로 쓴 것이라는데, 그런 표현을 할 만한 설경을 보여주는 듯하다.
강원도 출신이라 설경에는 좀 진심인 편이다. 산맥 근처의 심산유곡 출신은 아니라서, 30cm 이상의 대설이 심상한 일이진 않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1년에 한 번쯤 그런 눈을 경험해 보곤 했기에, ‘설부심’이 은근 남아 있는 편이다. 그래서 겨울하면 눈부터 떠올리고, 눈 하면 고갯마루를 넘어서 펼쳐지는 고향 동네의 풍경부터 떠올리게 된다. 그 풍경은 「설국」 의 첫문장과 완전히 겹쳐져 버렸다. 에치고쿠니(越後国. 일본의 과거 행정구역으로 현재는 니가타현)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구니에 도착한 듯한 느낌이었을 텐데, 고향 동네의 야트막한 고갯마루에 서서 바라 보는 풍경이 겹쳐진다.
그리하여 겨울이란 계절을 맞이 하는 책으로는 겨울의 눈 내리는 풍경이 확연한 문학작품들부터 떠오르게 됐다. 이거 참 난감한 일이다.
‘4만원 이내로 선정’이란 제한은 더더욱이나 사고의 흐름을 경직시켰다. “겨울, 계절 맞이”는 오로지 겨울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여러서부터 기차를 종종 이용했다. 경춘선을 이용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춘천의 외가도 그렇지만, 서울로 가는 가장 편한 방법으로 중앙선을 자주 이용했기 때문이다. ‘겨울’은 ‘설국’을, ‘설국’은 ‘눈 내리는 시골역’을 소환해 내고야 말았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다.
곽재구의 시집 『사평역에서』, 임철우의 소설집 『사평역』, 박상우의 단편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선정했다.
그렇게 3권을 선정하고 나니, 서가에 꽂혀 있던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최은영의 『밝은 밤』이 눈에 들어왔다. 긴 터널과도 같았던 괴로운 독서 경험을 제공하던 한강의 소설도 제주의 겨울밤을 배경으로 했고, 겨울을 지나 봄을 만나는 듯한 최은영의 소설도 첫 시작은 속초(작중 지명은 회령)의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추가로 목록에 넣었다.
곽재구의 시집 『사평역에서』, 그 시를 배경으로 쓴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 그리고 KBS TV문학관이란 드라마 시리즈의 「사평역」중에서 무엇을 먼저 보았고, 언제 보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유튜브로 다시 본 드라마의 경우엔 본 적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다. 아무래도 대학 시절 한 신문 기사에서 “사평에는 역이 없다”는 제목의 칼럼을 읽은 후에 무언가를 떠올려서 강렬하게 기억이 남은 듯하다. 지금이야 서울 지하철 9호선에 사평역이 생긴 이후라서 참 멋쩍어지긴 했으나, 가장 먼저 발표된 시의 작가인 곽재구가 “어디쯤엔가는 있을 법한 지명이고 그래서 역 하나쯤 있을 것 같아서 쓴 이름”이란 설명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니 오히려 신기해할 일이다 싶다.
곽재구의 시 한 편이 만들어내는 심상은 강력했고, 그리하여 임철우로 하여금 그런 단편을 쓰게 추동한 것이었을 테다. 심지어 ‘겨울 시골 역의 눈 오는 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꽤나 깊은 서정성을 자아내기에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을 터. 내게 그렇게 강렬한 심상이 만들어진 것도 유별난 것은 아닐 테다.
박상우의 소설을 처음 접했던 것이 바로 소설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었다. 「내 마음의 옥탑방」이 수록된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이나 『가시면류관 초상』이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첫 계기가 된 작품이었는데, 김춘수의 시나 프랜차이즈 카페의 상호와도 맥이 닿기에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았을 테다.
선정 결과를 통보하고 나니, 무언가 찜찜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겨울하면 떠오르는 책”을 묻기 시작했다. 쉽사리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기껏 나온 답이 역시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이었으니 말이다. 뻘밭에 빠진 발을 빼내려 하자 장화가 쓱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더 깊이 고민해 봤다.
첫째, “계절 맞이 추천”이란 행위에 구체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파악됐다. 처음 내 생각처럼, 겨울이란 계절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문학작품을 읽는 것으로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었으니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라,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배경지식은 이 책을 통해 채워라와 같은 실용적인 목적의 행위를 강구할 수도 있다. 겨울철이면 심해지는 심뇌혈관질환을 대비한다거나, 안전을 위한 자동차 월동 대책이라던가, 크리스마스 시즌 짝짓기에 유리하 패션 코디네이션을 공부해볼 수도 있다. 눈이 내린 풍경이 멋지니 그 설경이 좋은 여행지로의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도 필요할 테다. 여름과 달리 겨울이라고 사람이 동면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여름에 할 법한 일들을 겨울에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다 보니 내 생각의 구멍들이 더 커보이기 시작했다.
둘째, “추천 책” 사이의 맥락이 부족했다. 그저 ‘겨울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이란 것으로는 큐레이션의 맥락이 성립하지 않는다. 큐레이션이란 적어도 ‘수집, 선별, 제공’이란 3단계의 행동을 하나의 맥락(context)으로 관통해 성립시킬 필요가 있다. 그 맥락은 단순히 하나의 문장으로 성립될 수는 없다. 그럴 것 같으면 큐레이션이란 용어가 그 혼란을 빗어내면서 자리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다.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기획한 전시회에 그렇게나 말의 성찬이 이루어지는 이유도 단순히 하나의 문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맥락을 드러내기 위함일 테다.
셋째, “추천”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이태 전쯤이었다 싶은데, 내 블로그 포스트에 “최근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댓글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몇몇 국가의 경제 위기에 대한 연속물을 정리한 참이었던지라 그런 질문이 달렸을 테다. 하지만 딱하고 떠오르는 책이 없었다. 당시에 나온 관련 도서를 읽은 것도 없거니와, 참고삼아 읽었던 책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꽤나 막막했던 경험이었는데, 지금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인 문제다.
‘책을 추천하는 행위’는 큐레이션 그 자체다. 해당 분야에 대한 폭넓은 독서 경험으로 책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야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갖추는 것만으로는 추천이란 고도의 행위에 이를 수 없다. 뭐가 똥이고 뭐가 된장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초보자에게 필요한 기본서의 수준과 제법 공부해서 젠 체 하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전문서의 수준을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한다. 깊이 있는 학습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하여 남에게 책을 추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고민들을 하고 나니, 그 동안 이곳 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북큐레이션’이란 행위들에서 왜 헛헛함을 느꼈는지 조금은 깨닫게 됐다. 김미정의 책, 『북큐레이션』을 읽으면서 분노했던 이유들도 더 선명해졌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인데, 너무 만만하게 접근하는 태도에 화가 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