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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Jan 22. 2023

'한국의 트럼프'와 '미국의 윤석열' 따라잡기

큐레이션 실습1_정치현실을 살펴보고 정치철학을 고민하기


1.

 

 이런저런 성향테스트를 다 해봐도, 나의 정치적 성향은 좌-우 10점 척도로 하자면 대략 3점대가 나와서, 중도좌파 또는 사회민주주주의자 정도로 자리매김한다.

 기본적인 정치적 입장은 이렇다. 권력 특히나 시장 권력에 대한 불신이 높아서 중앙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성장 우선'이라는 말도 안 되는 레토릭보다는 '공정한 분배'라는 실질적인 성장 정책을 중앙정부에 의해 추동해야 한다고 믿는다. 언뜻 보면 제법 '빨갱이'스럽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권력이 필요한데, 위임된 이 권력이 정당한 권위를 획득하여 정의롭게 집행된다면, 이에 대한 시민의 복종은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위임받은 권력을 남용하는 독재가 발생하더라도, 시민의 불복종은 최대한 법적 당위성을 갖추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부분에선 꽤나 보수적이다. 동성결혼이나 성정체성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법적 보장은 상당히 리버럴liberal하게 접근하고 있지만, 그 자체에 대한 나의 혐오까지 억지로 누를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내재화하고 있지는 않다. 무엇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하며, '대체로 내가 맞고 그래서 네가 대부분 틀리다'를 관철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1997년 대선에서 기호 4번 국민승리21의 권영길에 투표한 이래로, 대선이나 총선,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노동당, 정의당 등에 투표해 왔다. 그러면서도 지난 10년간 방치해 두었던 당적이 흘러 흘러 국민의힘 당원으로까지 흘러들어 간 것도 그냥 두었더랬다. 언젠가는 괜찮은 보수정당으로 거듭나서 중도확장성을 갖추고 나 같은 사람도 포용할 수 있는 정책을 펼칠 줄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탄핵 이후, 이 당은 세 차례 쇄신의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반동reactionary적인 면모만 보여왔다. 답이 없다. 그래서 서울시당을 찾아가 직접 탈당신고서를 제출하고 왔다. 다음 주에는 탈당 증명서를 교부받으러 다시 가볼 참이다. 이제 노동당에 입당해볼까 싶었지만, 당 강령만 살펴봐도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끼어들 자리는 아니다 싶다. 아무리 멋으로 '진보'하는 '패션좌파'라도, 아닌 밥상에 숟가락 들고 덤벼들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다.


 그렇다 보니,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 보이는 정권과 여당의 정치는 내가 보기에 여간 '개판'이 아니다.

 윤석열이 대선판에 나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코미디인데, 심지어 제1야당의 후보가 된 건 더 큰 코미디였으며,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 당선이 됐다는 것 자체는 웃기 힘든 비극이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비극이 여느 비극과 크게 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자니, 절망스러운 한숨을 매일같이 내쉬게 된다.

 정부가 '작동'하기보다는 관성에 의해 '연명'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윤석열 대통령실은 '정치'를 하고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취임 전부터 대통령실 용산 이전을 졸속으로 추진하면서 '무속신앙정부'로 조롱받으며 시작했으며, 각료인선 과정에서도 그렇게나 깎아내렸던 문재인 정부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출범한 이후로 처음 내놓은 정책이란 게 기껏해야 '만 5세 조기 취학'과 같은 설익은 것이라서 또 뭇매를 맞았다. 그러고 나자 윤석열 정부는 공약한 정책을 수립해 나아가길 포기하고, 전 정부 흠집 내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자기에게만 보장하고, 남에게는 1도 내줄 생각이 없어서 최근에는 국제사회에 우세를 살 실태까지 보이고 있다. 바라보고 있기 참담한 수준이다. 마침내는 당을 사유화하기 위해서 윤리위를 통해 당대표를 날리더니, 이젠 전당대회 룰까지 바꿔가면서 개판을 치고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생각했다. 민주주의란 허울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수 있는 요즘이라고 절망했다.



2.


 답답한 마음을 글로 풀어내려고 보니, 어디서부터 손을 데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책이라도 읽어보자 싶어졌다. 책을 찾아 읽다 보면 생각의 갈피를 잡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두 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부터 펼쳐보았으나 이내 덮고 말았다. 진료는 의사에게, 조제는 약사에게, 정치적 문제는 정치학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에코 선생의 칼럼을 모아놓은 책은 속 시원한 대답을 내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박세연 역)의『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달랐다.

 트럼프 당선이 미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것인가를 주제로 쓴 뉴욕타임스의 칼럼에서 시작된 책이기도 하거니와, 칼럼의 인기에 힘입어 하버드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두 정치학자가 서둘러 써낸(그리하여 책의 각 챕터에서 중언부언하는 경우가 잦았다.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다.) 책이라서 정치학적 분석이 탁월하다. 21세기 개판난 미국의 민주주의를 민낯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런 토양에서 태어난 트럼프란 괴물이 그 이전 시대 민주주의란 형식 내에서 독재자로 변모한 이들과 어떻게 닮아가고 있는지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미국 사회에 나타난 트럼프란 재앙적 현실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판박이처럼 재현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가 있어서 놀라움을 넘어서 절망하게 된다. 무엇보다 절망스러운 것은 두 가지 사실 때문이다. 첫째, 민주주의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걸 망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성숙을 위해서는 다수 정치인의 선함이 전제되어야 하는 무척 곤란한 전제조건을 갖추어야 하지만, 망치는 데는 소수 정치인의 악함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3.


 트럼프 출현 이전을 포함해 미국 사회의 정치 환경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트럼프 시대와 그 이후에 대한 분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에 관한 책은 우연찮게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프레시안의 전홍기혜 기자가 쓴『아노크라시』가 제격이었다.

 프레시안이란 인터넷 언론의 기자에게 적당한 기사작성방식에 근거한 짧은 글들은 '인터넷 언론'이 소비될 수 있는 호흡과 길이로 쓰였다. 그리하여 머리 아프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깊은 성찰이나 숨이 막힐 정도로 나열되는 과다한 정보로 인한 고민은 필요 없다. 그저 빠르게 읽고, 쉽게 이해하며, 간단하게 동조할 수 있는 글이면 될 뿐이다. 미국의 유수 언론사의 기사들을 통해 영문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글로 쓰인 글을 통해 최근 미국 정치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속도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다. 두어 시간 각 잡고 앉아 읽으면 털어낼 수 있는 얇은 책에는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여러 문제들의 단초들이 제공되고 있다.

 다만, "이게 다 트럼프 때문"으로 점철되는 다소 표피적인 글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는 그리 좋은 인사이트를 얻기 힘들다. '아노크라시'의 개념에 천착해 미국사회에서 통용되는 중층적 의미에서의 아노크라시를 살펴본 것이 아니고, 그저 '있어 보이는 제목'으로 활용하기만 한 점도 아쉬움을 남긴다.



4.


 앞의 두 책을 읽다 보면, 리처드 호프스테터의『미국의 반지성주의』만큼은 반드시 읽어봐야겠다 싶어 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 사회에서 윤석열 정부와 반지성주의를 연결시킬 수 있었던 건, 윤석열 본인에게서 시작한다. 취임사에서 동의하기 힘든 용례의 '반지성주의'를 언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함을 쳤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입니다.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처해있는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지금 반지성주의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는 것이 바로 윤석열 정부라서, 취임사의 이 발언의 부적절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적반하장도 없다 싶은 생각이 든다. 호프스태터의 지적처럼, 1950년대에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우리의 일상어로 들어왔고, 지금은 못마땅한 여러 현상을 대개 반지성주의가 생활의 어떤 영역에서 설득력을 지닌 표현으로 여기"게 됐다고는 해도, 아직까지도 이런 식의 견강부회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활용하는 것은 더더욱이나 옳지 못하다.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과 함께 일어난 정치적 반동 현상에 대해 '지성적'으로 분석해 보기 시작한 결과가 지식인intellectual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했다는 것에 닿았다는 것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뉴잉글랜드로 넘어온 청교도puritan들은 지식인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호프스태터는 "청교도주의는 늘 지성과 감정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필요로 했으며, 지성은 뉴잉글랜드의 참된 종교에서 본질적인 것이라 여겨졌고, 감정은 청교도 신앙심의 힘과 지속성에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파악했다. 하지만 18세기 초반 대각성운동과 복음주의의 전파는 상황을 뒤집어 놓았다. 이때부터 "상심이 가장 고조된 때에 신도들이 반율법주의와 반지성주의로 향했"고, "다수파는 그 운동은 미신적 열광의 발작이자 전통적/합리적 권위에 맞선 반지성주의적 반역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러서부터 위스키와 싸움질 속에서 자라고 인디언의 습격과 열병, 학질의 위험과 고스란히 노출된 채 가난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며 살아와 교육이나 문화의 혜택을 누릴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은 아예 부정해 버리는 쪽이 그것을 결핍으로 인정하는 것보다는 나았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뉴딜시대에 이르러, "이론가나 대학교수를 자문역이나 이데올로그로 활용함으로써 지적인 진영과 권력을 좀 더 밀접하게 연결"하면서, "이론, 비판이 새로운 가치를 얻기 시작해, 지적인 소양을 쌓은 인재들이 필요해졌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나 "교수들이 사태를 좌우하고 있다는 통념이 퍼졌다"는 점에 주목했고, "쟁점의 조건 자체를 정하고 경제/사회적 쟁점의 윤곽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특권"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반대 진영에서는 "자신들이 신뢰하는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빠져서, "반지성주의라는 오랜 전통을 확인하고, 새로운 의심과 분노로 그 전통을 강화"했다고 보았다.


 그렇게 건국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배태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살펴보다 보니, 지금 윤석열 정부의 광기 어린 반지성주의는 비단 갑툭튀의 종특이라 비난할 수만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5.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책장을 넘기면서 하나둘씩 쌓여갔던 찝찝함은 결국 칼 퍼의 고전을 다시 펼쳐 보게 만들었다.  

 스파르타 정치의 원칙은 이러하다. (1) 스파르타의 통제된 부족주의의 보호: 부족 금기의 엄격성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를 모든 외국의 영향을 배척한다. (2) 반인도주의: 특히 모든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적, 개인주의적 이념들을 배척한다. (3) 자급자족: 무역에서 독립적이 된다. (4) 반보편주의 혹은 지방주의: 자신의 부족과 다른 부족 사이의 차이점을 견지하고, 열등종족과 섞이지 않는다. (5) 지배권: 이웃을 지배하고 노예화한다. (6) 그러나 너무 비대한 국가는 되지 않는다: “도시국가는 그 통일성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특히 보편적인 경향을 도입할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만 성장해야 한다. 이 여섯 개의 주요 경향을 현대 전체주의 경향과 비교해 본다면, 단지 마지막 것만 제외하고는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305쪽.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서울:민음사. 2013.

 십 수년 전에 마지막으로 펼쳐보았던, 백 년 전에 쓰인 이 오래된 고전을 다시 펼쳐봤다가 꽤나 놀라게 됐다. 2400년 전의 그리스에서 그다지 진보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도 그러하지만,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가 1도 내재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경악스러웠다. 밀물 때를 만난 것처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시나브로 '남 탓'이나 하는 나의 모자람을 되짚어 보게 됐다.

 소크라테스의 신념은 공개적으로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하였기 때문에, 플라톤은 그것을 닫힌사회에 대한 신념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이 일은 어려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던가? 민주주의는 그를 요구할 어떤 권리도 상실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지혜가 없다는 이유로 다수의 대중과 그의 지도자를 비판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소크라테스는 ‘교육받은’ 학식 있는 철학자의 통치를 권장했기 때문에 그를 재해석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323쪽.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I』. 서울:민음사. 2013.

 윤석열 정권과 같은 진영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는 것이,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를 팔아먹는 플라톤이 아니었는가를 반성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6.


 조너선 하이트가『바른마음』에서도 밝혔듯이, 인간의 도덕적 판단은 훈련되고 선택된 직관에 의해 결정되고 사후적으로 이를 정당화할 이성적 판단들을 동원하게 된다. 정치적 판단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정해진 선택지 내에서 옮고 그름을 판단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철학적 오류에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내로남불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허경의 책,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도 다시 펼쳐볼 수밖에 없었다. 허경은 "진실은 하나밖에 없는데, 나의 체험이 진실하니 그로부터 형성된 나의 생각은 옮고, 따라서 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 동시에 옳을 수는 없으므로, 다른 이들의 생각은 틀린 것이리라는 검토되지 않은 막연한 믿음"은 "자기 체험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 보다 정확히는 자신이 진실을 체험한 것을 한 번쯤 부정하고 스스로의 체험과 판단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본 경험의 부재에서 온다"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합리적 ‘진리’란 없으며, 오직 당사자들 사이의 협상과 합의, 그리고 이들의 이익이 합치하는 한에서의 한시적 연대만이 있을 뿐"이라는 그의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정치적이고, 우리 모두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그의 단언, 거기에 덧붙여진 "진영이 없다는 생각 자체가 또 하나의 진영으로, 진영에는 바깥이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 이성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다시 깨닫는 순간, 소크라테스의 후예를 자처하고 싶은 자에겐 다행이면서도 부끄럽기 그지 없는 순간이다.



7.


 이렇게 하나의 맥락을 타고 이어졌던 독서는 제법 즐거웠다. 거기에서 한 발 나아가 '수집-선택-전시'라는 큐레이션의 과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6권의 책을 묶어내서 드러내는 글을 정리해 보았다. 이 또한 머리 아프지만 재밌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두 가지 걱정이 남는다. 하나는 좋은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가의 문제가 있고, 남은 하나는 이렇게 묶어놓은 것이 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서점에서 북큐레이션에 응용한다고 했을 때, 과연 이 책들이 팔릴 수 있을까는 고민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장담컨테, 그 무엇 하나 쉽사리 팔리지 않을 테다. 정치와 철학이라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인기없음을 차치하고서라도, 알라딘 중고매장에서의 판매 상태를 살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중고 매물이 많지 않다는 건, 그만큼 새 책도 팔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서점의 북큐레이션'으로 보면 '씰~데없는 짓'이었을 테지만, '도서관의 북큐레이션'이라면 그리 의미없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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