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주)알마. 2017. “동아서점을 더 알 수 없게 됐다"
처음 시작하는 일을 우선 ‘책으로 배우는 것’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배우는 일’은 대뜸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16년간 길들어졌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때는 ‘국정 교과서’로, 중학교 때는 ‘문제집’으로, 고등학교에선 ‘수학의 정석’과 ‘맨투맨 종합영어’ 또는 ‘한샘 국어’로 공부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권영성 헌법’, ‘이재상 형법’, ‘곽윤직 민법’, ‘조순 경제학원론’으로 공부하거나, 이익섭, 이기문, 임홍빈 등의 국어학자들이 쓴 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 되어서야, ‘교과서’의 그늘을 벗어나서 ‘참고도서’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무얼 처음 접하든 관련 도서부터 챙겨보는 것이 ‘꼰대’들의 디폴트값이 된 건 그런 까닭이다. 다만 책방이란 업역이 체계화된 학문의 영역이 아니다 보니, ‘서점학개론’이란 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계보학적인 흐름을 정리하고 있는 씬scene도 아니라서, 무슨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하나 초심자의 입장에선 꽤나 난감하긴 하다. 다들 닥치는 대로들 읽다 보니 나름의 체계가 잡히는 듯하다.
둘째는 ‘경험’을 전달받는 가장 저렴하고 편한 방식 또한 ‘책’이라는 경험에 근거한다. 책을 쓰기 위해서는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고, 그렇게 경험의 이식을 ‘체험’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나 축적된 실패 경험에서 쌓여진 이론과 같은 경우가 우리가 책을 통해 습득하고자 하는 지식의 대상이 되곤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비극적인 사실이 ‘내게 딱 맞는 책’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좋은 책’을 놓치거나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있고, 어느 정도 지식이 쌓이면 내 관심 분야에 한정해 깊이 있는 분석을 가져간 책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져서 그렇다.
내가 책방지기들의 책을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책방을 운영해 본 적도 없고, 당장 운영해 보면서 ‘맨땅에 헤딩’을 하거나, ‘삽질’하면서 배울 상황도 아니라서 말이다. 결국 남들이 먼저 경험한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보자는 얄팍한 잔머리가 그 연유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에세이집을 손에 쥐게 되면 낭패스럽기 그지 없다. 실패에서 비롯되는 자기극복의 서사나 간난의 연속인 사업 경영에서 깨우치는 인생의 극의랄지 때론 인간 혐오에 빠지게 할 정도로 악의가 넘치는 사람들 때문에 힘든 인생이 결국 또 다른 사람들의 따뜻함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 따위의 ‘말랑말랑’한 이야기는 굳이 책방일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굳이 책방지기의 글에서 기대하진 않는다.
천성이 야박해서 타인에 대한 평가도 박한 편이다. 리커트척도로 5점을 주게 되면 3점이 가장 많은 편이지만, 4점보다는 2점이 많고 5점보다는 1점이 훨씬 더 많은 편이다. 쉽게 말해서, 별점을 주면 보통 별 세 개를 주고, 별 하나나 둘 정도 주는 일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평균이 3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2.5쯤으로 수렴하는 듯하다.
그런 사람이라서 책을 읽고 남에게 섣부르게 추천을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다들 훌륭하다 칭찬하는 책에서도 꽤나 이것저것을 트집 잡곤 한다. 기껏 추천해주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뚱한 얼굴로 "아... 그 책은..."으로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서로 민망해지는 순간이기도 한데, 나는 상대의 ‘나이브’함을 마뜩찮아 하는 것이며, 상대는 나의 ‘꼴값’이 고까운 것이다. 남들 다 좋다고 하는데, 뭘 그리 까칠하게 구는가를 스스로에게도 물어본 적도 꽤 있다. 그리하여 "예, 괜찮더군요"라는 이도저도 아닌 대답을 건네는 일이 참 많아졌다. 리커트척도로 7점 척도를 가져온다면, 3~5점을 커버하는 마법의 단어가 된다. 나는 3점 정도의 평가를 돌려 말한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5점쯤으로 멋대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괜찮은 에세이이기도 하고, 괜찮은 책방에 관한 글이기도 하다.
좋다거나 뛰어나다고 호평하기에는 모자람이 있고, 좀 아닌 듯하다며 혹평하기에는 문장력도 준수하고 이야기의 직조력도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 자기 고백에서 시작해서 서사를 성장시켜나가는 에세이스트의 기본이 되어 있다. 전업작가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어느 정도의 문장력은 갖추고 있는데,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는 경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읽어내기 괴로울 정도로 엉터리인 문장도 없다. 지난 1년간 평생 읽어 본 적 없는 엉터리들을 워낙 자주 접하다 보니 이만하면 됐다 싶어졌다.
게다가 서점 운영에 대한 고민들이 꽤나 촘촘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궁금하고 내가 읽고 싶었던 것은 서점에 관한 그의 고민이지, 가업 승계 과정에서의 아버지와의 관계라던가 그의 연애사를 읽고 싶었던 건 아니라서 말이다. 물론 그것들이 동아서점이란 개별 서점의 운영에서는 중요한 사실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은 함정. 무엇보다 구멍가게 같은 소규모 책방 이야기만 읽다가 종합서점에 관한 글을 접해 보니 새로운 것들도 몇 가지 고민해 볼 수 있게 됐다.
2015년 동아서점 일을 시작한 뒤로 2년여의 경험을 녹여낸 책이라서, 이미 5년이란 시차가 발생한다. 이제 8년차 책방지기인 김영건은 단순히 책 여러 권을 써낸 작가 정도의 위상이 아니라, ‘지역 서점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그와 동아서점에 대한 언론 기사는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진행한 포럼에서 <지역문화의 허브로 재탄생하는 지역서점>이란 주제로 발제를 할 정도의 인물이 됐다. 그러니 올해 초에 내놓은 에세이는 5년 전의 청년과 또 다른 사람이 쓴 글이 실려 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말에 들러서 이 책을 사들고 나왔던 동아서점의 풍경은 예상과 달라 꽤나 날카롭게 각인되어 있다. 신문기사에서는 ‘전국구 서점’이라 칭하고 있던 그 넓은 서점 안에 단 두 사람의 내객(그 중에 하나가 나였다)뿐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5년 춘천 명동에 있던 청구서적(2006년에 문을 닫았다)의 저녁 풍경이 재현되길 기대했던 터라 더 서글펐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다시 속초에 들렀을 때 쓰윽 사들고 올 수 있을지 지금 당장은 모르겠다. 동아서점이 앞날이 걱정스럽다기 보다는, 동아서점을 바라 보는 나의 시각이 너무 혼란스러워 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