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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Mar 10. 2023

[리뷰] 오세라비外_『페미니즘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글통. 2020. 이 책의 저자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1.

 책을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제목’이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때론 책을 직접 펼쳐보면서 머리말이나 목차를 살펴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면 검색되는 책의 제목만으로 책을 고르기도 하는데, 막상 책을 펼쳐봤을 때 낭패스러운 경우가 꽤나 잦다. 이를테면, 동네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관심 주제에 대한 키워드로 도서들을 검색하다가,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하곤 대뜸 상호대차 서비스를 신청하면 그렇게 된다. 

 제목은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기 위해 고심 끝에 지어지기 마련인데, 그렇다 보니 역으로 제목으로 장난질을 치는 경우도 왕왕 벌어진다. 잘 지어진 제목은 책의 내용을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길 반복하기도 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책 제목만으로는 꽤나 학술적인 비판서가 아닐까 싶었고, 안티페미니즘 진영에 가까운 내게는 몹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제목이었다. 덥석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센터 2층의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수령해온 뒤, 책을 펼쳐 보곤 기함했다. 내가 또 ‘쓰레기’를 주워 왔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진지한 통찰이 전무한 이들이, 페미니즘 주변부의 병적 현상들을 가져와 본질로 호도하면서, 심지어 반지성주의적이고 반학술적인 논지 전개를 통해, 페미니즘을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안티페미니즘 전선의 단일 쟁점 정치에 활용할 수 있는 혐오 가득한 프로파간다를 생산하고 있기까지 했다. 엉터리 책을 만났다면, 그냥 책장을 덮으면 그만이다. 김민희의 『다정한 개인주의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덮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 장장구구마다 펼쳐지는 엉터리들을 그냥 못본 척하는 것으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진욱의 『그런 세대는 없다』를 굳이 동해 바닷가까지 들고 가서 머리 터지게 읽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동의하기 힘든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를 확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펼쳐든 날은 3월 8일 세계여성의날이었다. 아무리 페미니즘에 대해 껄끄러운 마음이 드는 나라고 해도, 날이 날인지라 더 불쾌해질 수밖에 없었다.


2.

 오세라비와 김소연의 글(나연준의 글은 페미니즘에 대한 비난조차 아니라서 언급할 가치가 없다.)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이들이 페미니즘을 학술적으로 접근한 경험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비판을 위한 실증연구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문제점은 곧바로 ‘비판’의 유효성에 직면하게 된다. 비판이란 비판 대상이 설정되어야 하고, 그 대상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지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들의 글에서는 그 두 가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려면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를 가져가야 한다.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상식’ 수준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그냥 ‘똥글’을 싸지르게 된다. 독립출판이나 독립서점에 대한 논의를 가져갈 때나, 북큐레이션에 대한 논의를 가져갈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페미니즘은 단순하지 않다. 20여년 전 기껏해야 문학비평의 한 갈래로 쥘리아 크리스테바나 엘렌 식수의 페미니즘 비평이론으로 처음 접하게 된 페미니즘의 세계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샤를 푸리에가 1837년 처음으로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엄청난 확장성을 보여주면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한마디로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된 독서를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다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지만,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 단순하지 않은 ‘이념’에 대해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반대의 입장에 선다는 건, 거의 ‘생활 신앙 수준의 반공’과 큰 차이가 없게 된다. 1980년대에 반공교육을 받고 자라왔던 세대에게는 공산주의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시뮬라시옹이 형성되어 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고, 그저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만들어낸 괴물들만이 개별적으로 존재해 왔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망상 역시도, 그와 같은 기제를 통해 강화되는데, 그렇게 강화된 시뮬라시옹에 근거해 페미니즘을 피판하는 것이 오세라비와 김소연의 태도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실증적 태도’의 실종이다. 인문학의 학술적 태도에서는 대부분 개념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경우가 잦다. 사회과학(자연과학에서는 유사과학이라 멸시하는)에서처럼 실증적 연구 방식을 가져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렇다 보니, ‘그냥 말로 때우는’ 것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아무렇게나 말장난을 해도 인문학에서는 다 받아들여진다는 순진함을 넘어선 멍청한 착각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래서 인문학적인 방법론을 가져갈 때는 객관적 추론이 아닌 추정을,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차용할 때는 통계자료에 대한 분석 없이 ‘인용’하는 누를 범하고 있다. 

 제대로 된 비판이 되려면 ‘~것 같다’와 같은 지레짐작은 피해야 한다.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추론할 때에도 보통은 ‘추정해 볼 수 있다’고 기술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120쪽
 오늘의 여성운동은 세심한 피해자 보호 보다는 사회적인 이슈파이팅에 더 유혹을 느끼는 것 같다. 
131쪽
 아마도 아웃리치 현장지원 사업에 사업비를 받았으니 정산서를 제출하기 위해 상담 실적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중략) 아마도 이런 과정을 거쳐 상담일지를 만들었으리라.

 무엇보다 확정적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그 근거가 명확해야 한다. 우리가 보통 인용을 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글을 통해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고 말하면서 나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가 그러질 않는다. 기껏 활용하는 방식이 외국 학자의 발언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며 ‘신성불가침한 말씀’쯤으로 인용한다.

 72쪽
 현대는 여자답게 남자답게를 강요하는 시대가 아니다.

 위와 같은 문장에서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기지배가 어디서~’와 ‘사내새끼가 어쩌다가~’를 꾸준히 강요하고 있는 사회를 살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위와 같은 호언이 와닿을 리가 없다. 그냥 ‘눈 감고 귀 막고’ 산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 삶에 뿌리깊게 내려박힌 성역할의 관념은 일상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런 엉터리 주장에는 아연실색해질 수밖에 없다. 

96쪽
 성범죄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무고 혐의로 고소되는 경우 성폭력 사건의 수사가 종료될 때까지 무고 혐의로 고소되는 경우 성폭력 사건의 수사가 종료될 때까지 무고 사건을 조사·심리·재판 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차라리 성관계 금지법을 만드는 게 성범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방법이 아닐까?

 이 논리라는 개념은 물에 말아서 후루룩 잡순 것 같은 문장을 바라보고 있자면, 나의 지성이 반지성주의에게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물론 두 번째 문장은 무논리를 기본으로 하는 빈정거림이란 걸 모르진 않는다. 다만 그 빈정거림 앞에 기술된 문장으로 인해, 빈정거름에 이르는 논리의 부실함이 참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민사의 반소처럼 남용되는 성범죄의 무고죄 고소는 동시에 진행되는 것보다 순차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실체적 진실의 추구라는 형사법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다. 앞선 주장도 빈약한데 그것에 기대어 무논리의 빈정거림을 가져가는 태도는 반지성주의의 대표적인 예라서, 바라보고 있자면 화가 치밀어오른다.   


 심각한 행태는 다음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통계를 다루는 방식은 몹시 신중해야 한다. 남이 만든 통계를 2차 자료로 활용해서 글을 쓸 때는 더욱 신중해져야 하는데, 그런 태도가 1도 없다. 한심스럽다.  

57쪽
 행정부 국가공무원 중 여성비율은 2017년 처음으로 50%를 넘어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48개 중앙부처 여성 공무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경찰청으로 75.1%를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분야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는 그 어느 시기보다 높다. 

 여기서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드러난다. 첫째는 인사혁신처의 ‘2018 균형인사 연차보고서’의 내용을 다룬 기사를 아무런 검증 없이 3차적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 잘못된 내용에 근거해서 논지를 펼치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그리하여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이 잘못됐다는 점이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경찰청의 양성평등 고용에 관해 여성 비율이 75.1%로 기술되어 있다. 경찰청에는 경찰공무원이 아닌, 민간인 공무원을 몹시 많이 채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보고서의 대상은 일반직/외무/별정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하급 기술직에 여성공무원을 상당수 채용하고 있어서 남성 1,015명 대 여성 3,055명으로 75.1%의 비율로 나타났지만, 고위공무원에서는 남성 5 대 여성 2의 성비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보고서를 다룬 기사에서는 이런 사실을 다루지 않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이 기사를 베껴 쓰다 보면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분야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는 그 어느 시기보다 높다”는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 못한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통계 분석에서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결여됐다. 해가 지났으니 2022년 통계까지 나오고 있으니, 여성의 국가공무원 합격률 상승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광역자치단체별로 실시하는 지방직 공무원 시험까지 함께 살펴본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여성의 국가공무원 시험 합격 비율이 상승했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사혁신처 공무원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성 응시자 비율이 합격자 비율보다 높아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여성이 덜 차별 받으며 채용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공무원에 몰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생산된 프로파간다가 “경찰청의 여성비율이 75%나 되는 건 일 안 하는 여경들이 죄다 경찰청 사무직으로 몰려가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에 동원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반지성주의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는 안티페미니즘 진영에서 아주 쉽게 발견되지만, 워마드나 2018년 혜화역 시위의 양상처럼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발견된다. 상부구조에서 던져주는 간략화한 행동강령과 도그마로 무장한 홍위병들이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는 경우는 전선을 맞댄 모든 진영에서 쉽게 보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문제이고, 그래서 끔찍하기도 한 것이다.


 사회과학적 연구방법론에서 가장 신중해야 할 것이 통계를 자의적으로 분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이비들은 통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엉성한 논리 구조를 만드는 실수를 곧잘 저지른다.

98쪽
 전 연령층에서 남자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남자들이 살기에 힘들다는 방증이 아닌가.
 산재 사망자수 1년에 약 2,000명 중 98%가 남성임에도 사회적인 관심도는 낮다.
 페미니즘운동이 가뜩이나 남자 자살률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더욱 악역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우리 사회가 남성우월주의, 남성중심 사회가 극심한데도 왜 남자들의 자살률은 이렇게 높은지 생각해 보았을까?

 위에서 이미 지적했던 잘못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산재 사망 사고가 발생하는 사업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와 같은 성비는 설명이 된다. 사업장의 근로자 성비가 그대로 산재 사망 사고의 성비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과학적 연구방법에 근거하면, 단순히 1차적으로 인지되는 ‘사실’만으로 분석을 종결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시작으로 사실들이 보여주는 관계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럴듯한 유언비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반지성주의적 음모론자들이나 그럴 뿐이다. 

 자살률도 마찬가지다. 에밀 뒤르켐의 한 세기 전 연구를 떠올려 본다면. 자살률을 가지고 단순히 남성와 여성의 삶의 질 문제로 치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논의를 당연하다는 듯이 가져온다. 심지어 “페미니즘운동이 가뜩이나 남자 자살률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더욱 악역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적 정합성이 결여된 주장도 곁들인다. 이 따위 문장들은 내 지성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이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 오히려 “남녀 간 자살률 성비(남/여)는 10대에 1.1배로 가장 낮고 80세 이상이 3.7배로 가장 높았다”는 통계의 다른 부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3.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엉터리가 쓰이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다. 책을 대출하고 나서, 이들 저자들의 약력을 살펴보았다. 사실 책을 펼쳐보기 전부터, 이런 사람들이 저자라면 책의 내용이 어떨지는 대충 예상을 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이영희가 오세라비란 필명을 쓰면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당적 변경의 시기와 맞닿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을 시작으로 정의당에 이르는 오래된 ‘진보정당’에 참여해왔던 그가 돌연 정의당을 탈당한 때부터 시동이 걸린 그의 반동적 태도는 스스로 보수정당에 참여할 때까지 꽤나 열심히 진화했다. 이 책에서도 살짝 언급되었다시피, 과거에는 시혜적 입장에서 여성빈민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여성운동진영에서 헤게모니 경쟁을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강단페미니스들과 주류 여성운동가들에게 도태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보게 된다. 강단페미니스트들에 대한 학술적 근거는 전혀 없는 비난 태도와 함께, 주류 여성운동에 대한 동의하기 힘든 운동관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서 그렇다. 무엇보다 오랜기간 진보정당에 참여해왔던 사람이 아주 극적으로 보수정당으로 돌아선 것도 그런 짐작의 개연성을 강화해주게 된다.

 이와 같은 의심은 김소연에 이르면 명확한 사실로 드러난다. 더불어민주당에서 갑작스런 공천으로 대전시의회에 입성했던 김소연은 선거과정에서부터 지역 여성운동진영과 불화를 겪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당선 이후에는 심각한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그 개싸움의 끝이 제명으로 일단락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김소연의 표변은 개인적인 복수심이 불탄 탓이 크겠지만, 보수정당에서 입당과 탈당 그리고 복당신청을 거듭하는 과정을 살펴 보면,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책의 저자들 사이에는 ‘미래대안행동’이라는 단체도 끼게 된다. 어디에선가는 “진보정당에서 국민의힘으로 이적하려는 자들의 중간 세탁소”라고 조롱받고 있는 이 단체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여럿 등장하게 된다. 진보진영에서 변절자로 욕을 먹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다. 그리하여 ‘난 빨갱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자기입증책임이 큰 사람들이 페미니즘의 반대편에서 ‘베드로’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와중에 김소연은 박차고 뛰어나갔던 국민의힘에 작년말 복당 신청을 했지만, 여전히 복당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강용석이 경기도지사 선거에 참여했을 때, 그 캠프에 참여하면서 탈당했던 건데, 이제는 강용석에게 속았다며 복당 신청을 했다. 이쯤 되면 배신을 당하는 게 습관인 건지, 배신을 하는 게 습관인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디시인사이드 강용석 갤러리> 자기현시욕구는 종종 신념을 배신하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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