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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May 01. 2023

번역서를 읽을 때 느끼게 되는 두 가지 짜증

[북리뷰] 어밀리아 호건. 『노동의 상실』. 이콘. 2023.

 오늘은 근로자의 날 또는 노동절 아니면 메이데이라고 불리는 날입니다. 법정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빨간 날’은 아니지만, 근로계약을 맺고 일을 하는 이들은 상당수 휴일이 됩니다. 하지만 위탁계약이나 도급계약을 맺고 일을 하는 이들에겐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오늘도 일을 하는 날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읽고 읽는 책이 『노동의 상실』입니다. 2주 전쯤에 동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던 책인데요, 그저께 빌려다가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법 짜증이 솟는 독서경험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1. 

역시나 “영국 빨갱이”입니다. 어밀리아 호건의 글은 전반적으로 흥미롭습니다. 에바 하이파 지로, 필 존스의 글만큼이나 찰집니다. 내용만을 두고 봤을 때는 흠잡기 어렵습니다.     



2. 원제와 아득히 멀어진 번역서명


 번역서를 접할 때 짜증이 폭발하는 지점은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우선은 제목입니다. 원제와는 아득히 멀어진 번역서명이 그렇습니다.

 늘 투덜거리는 일이지만, 보통 책을 고를 때 그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제목으로 가늠하게 됩니다. 과거 카드목록(card catalog)을 활용해 책을 찾곤 했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제목은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책들은 ‘몹시 창조적으로’ 제목을 바꿉니다. 《Lost in Work: Escaping Capitalism》이 『노동의 상실: 좋은 일자리라는 거짓말』로 바꾼 이유를 절반쯤 읽은 지금으로서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원제가 전달하는 의미와는 사뭇 다른 번역서명은 아예 책의 본질적인 내용조차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들어서 자본주의와 노동의 관계를 비중 있게 다룬 영국 빨갱이와 미국 빨갱이의 책을 여러 권 읽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제목을 번역한 책도 있었고, 한숨 나올 수준으로 멋대로 번역한 책들도 있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책의 내용을 먼저 파악한 뒤에 선택하게 된 경우라도 제목에 현혹되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부제 정도는 착실히 붙이는 경우가 많았고요. 

 물론 본제를 제대로 번역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우리말로 맛깔나게 번역하기엔 통사구조가 완전히 다른 언어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형태로 지어진 두 편의 영화 제목을 살펴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Lost in translation》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Lost in Space》는 《로스트 인 스페이스》로 붙여졌습니다. 이 책의 본제는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일work에서의 피동적 주체성 상실lost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일로부터 일하는 자worker가 소외되는 것은 모두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작가는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제의 본제와 부제는 몹시나 노골적으로 이 책의 주제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번역서명은 책의 내용 주변부로 시선을 돌려버립니다. 참담합니다.  심지어 'good work'는 '좋은 일자리'로 번역되어 부제에 붙어버립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역시 무척이나 번역하기 어려운 제목을 가까스로 번역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원제인 《Survival of the Friendliest》는 우리에게 '적자생존'으로 고착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표현인 'Survival of the fittest'를 활용한 것입니다. '다정자생존'이나 '절친자생존'과 같은 식으로 번역했다면, 오히려 안드로메다로 갔을 겁니다. 심지어는 적자생존이란 표현의 기반인 스펜서의 영어 표현을 몰랐던 사람(바로 저 같은)에게는 원제목의 의도가 1도 다가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맥락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 책이 왜 과학책인지 제목만으로는 유추할 수 없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3. 부정확한 용어의 오역


 번역서를 읽을 때 짜증이 폭발하는 두 번째는 “용어의 정확한 번역”문제입니다. 

 같은 말일지라도 법률용어의 정의가 다르고, 학문 영역에 따라 그 정의가 조금씩 달라지곤 합니다.

 당장 우리 법률에서는 근로와 노동이란 말을 함께 쓰고 있는데요, 영어로 번역하면 labour가 됩니다. 학술적 정의로는 근로와 노동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법률적으로는 좀 달라집니다. 헌법과 근로기준법(노동 3 법 중에 하나)에서는 노동이란 표현을 사용(근로기준법 제2조 1항의 3에서 “근로”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고 정의하는 것은 예외로 합니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를 시작으로 노동조합법(노동 3 법 중에 둘) 등에서는 노동이란 표현을 더 많이 씁니다. 그렇다 보니 좌파는 노동이란 표현을, 우파는 근로라는 표현을 선호하곤 합니다.

 아직 ‘노동학laborology’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과학이 정립되어 있지는 못합니다만, 상당한 진척을 이루어냈다는 점도 부정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노동에 관한 담론들에서 용어들이 위계를 갖추고 정리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유되기도 합니다. 역어의 선택도 마찬가지라서, 이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오역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Work와 Labour의 차이를 시작으로, task나 job은 일/일자리/직업 등을 쉽게 혼용해서 번역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노동학적’인 담론에서라면 아무렇게나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이 책에서는 끊임없이 work를 exercise, labour, job과 구별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만, 번역은 종종 혼용되어 사용됩니다. 몹시 짜증 납니다. 그리하여 worker/labourer/employer의 경계마저도 허물어진 듯합니다. '좋은 일자리'라는 표현은 good work/good job이 혼용됩니다. 이는 ILO가 정의한 good work/good job과 decent work/decent job의 용어적 변천에서 파생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보니 영국정부에서는 'good work'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그것이 어떤 일자리(job)인지를 규정합니다. 이 책에서 끊임없이 지적하는 '좋은 일자리'란 영국정부가 규정한 'good work'라는 특정 대상이 됩니다.

 이쯤 되면, 그냥 영문을 읽고 말지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입니다. 저는 한국어 단일언어사용자이기 때문에, 한국어로 작성된 문서가 가장 읽기 편합니다. 그래서 번역서를 읽습니다. 하지만 두세 배의 시간을 들여서라도 차라리 영문으로 읽을까 싶은 번역서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좀 그렇습니다.   

 

      

4. 다듬어지지 않아 어색한 문장

 번역 문장을 읽다가 보면 어느 순간 이질감을 느끼는 문장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직역이나 한자어로 이루어진 문장 구조에 뜬금없이 나타나는 평이한 부사어 같은 것들이 말입니다. ‘교수체’나 ‘꼰대체’로 이루어진 학술적 문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우입니다. 문장을 쉽게 번역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잡한 직역인 거죠. 심지어 전문용어라고 할 것도 못 되는 용어들마저도 세상 처음 보는 단어로 ‘직역’을 해놓곤 합니다. 배경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문장들을 만나게 되면 독서 흐름이 뚝 끊기게 됩니다. 다시 흐름을 잡고 독서를 이어나가는 것이 몹시 힘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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