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조선의 과학기술사』. 푸른역사. 2023.
1.
독자가 책을 꺼내 들었을 때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뉩니다.
기대를 갖고 책을 집었느냐의 두 가지와 만족하고 책을 덮었느냐의 두 가지가 조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잔뜩 기대하고 집어든 책이 아주 만족스러웠을 때는 극찬을 하게 됩니다. 별 기대 없이 집어든 책이 아주 만족스러웠을 때는 절찬을 하게 되고요. 하지만 잔뜩 기대하고 집어든 책이 아주 별로일 때는 어떻게든 다 읽게 됩니다. 불만족을 표현하기 위해 책을 혹평해야 하니까요. 다만 별 기대 없이 집어 들었던 책은 쉽게 책장을 덮게 됩니다. 그럴 줄 알았기 때문이죠.
크게 기대한 책이 아니었습니다.
제지술 가지고 과학기술사를 논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제지술은 꼭 다루게 됩니다만, 그 제지술의 역사만으로는 책 한 권이 나올 수가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충분히 언급하고 있듯이, 제지술을 가지고 실제 일을 한 장인들에겐 자신의 기술(技術)을 기술(記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로 작문이 가능하거나 한문으로 작문이 가능한 '지식인'은 제지산업을 '구경'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정교한 작업에 대해 상세히 다룬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기술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꽤나 파편적인 사료에서 한계가 명확한 추론만이 가능하더군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만 제지술에 대해 다루고 있었고, 우려했던 그대로 과학기술사를 다루진 못하고 그저 경제사와 사회사의 어중간한 혼합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적 기지"를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억지스럽게 '과학기술사'를 다루는 것처럼 기술하는 데에는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습니다. 제목을 제대로 붙이려면, <제지술을 중심으로 살펴본 조선의 경제사회사> 정도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2.
올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키키 스미스 Kiki Smith의 개인전, 《키키스미스-자유낙하》를 관람했습니다. 참 다양한 물성을 드러내는 종이들에 개성 넘치는 미술 세계를 구축했더군요. 그 와중에도 제 눈을 사로잡았던 건 바로 종이들이었습니다. 키키 스미스의 작품에 활용된 종이들 중에서 눈에 띄는 것들을 정리해 보니 대충 다음과 같았습니다.
ㄱ. Neplaese Paper(Lokota paper)
ㄴ. Echizen Kouzo Kizuki paper
ㄷ. Sekishu Torinoko Gampi paper
ㄹ. Masa paper
ㅁ. Losin Prague Paper
ㅂ. Entrada Rag Natural
네팔종이는 팥꽃나무속(genus daphne)의 섬유질을 이용해 만든 종이이고, 에치젠 코조 키즈키나 마사종이는 한지와 마찬가지인 닥나무(Broussonetia kazinoki, 楮/코조)를 이용하며, 세키슈 토리노코 감피는 감피(雁皮, Diplomorpha sikokiana) 나무의 섬유질을 이용합니다.
체코 로시니 마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로진 프라그는 독특하게도 면을 이용하며, 엔트라다 래그 내추럴은 리넨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섬유질로 종이를 만드니, 참 독특한 물성을 지닌 각색의 종이들이 나오는구나 싶었습니다. 면섬유를 이용해 만드는 지폐를 두고 "지폐는 종이가 아니다"라며 몹시 놀라운 사실인 양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로진 프라그 같은 걸 보면 역시 지폐는 종이가 맞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평소 출판문화에 관심이 높은 편이어서 제지산업에도 눈길을 주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제지산업사에 대해서 더욱 궁금해지게 됐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시회 관람 이후에 로스 킹의 『피렌체 서점 이야기』나 에머런스 보서크의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그리고 뤼시앵 페브르와 앙리 장 마르탱의 『책의 역사』 같은 책을 접하면서 유럽의 제지산업상을 힐끗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제지산업이 시작된 건 13세기말 이탈리아였다고 보고 있고, 산업으로서 규모화할 수 있었던 건 14세기말이었다고 전합니다. 제지에 필요한 원료인 섬유질을 공급받기 위해 유럽에서는 '넝마'를 주로 썼는데, 흑사병으로 엄청난 사망자가 나오면서 그들의 옷가지들이 제지산업의 원료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끊임없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원료 공급과 조업 시설 운영 그리고 소비 시장이 그것입니다. 유럽에 제지술이 전달되고 나서도 처음에는 원료 공급의 문제로 인해 제약이 심했고, 원료 문제가 해결 됐을 때에는 조업 시설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중산간지방에서 수력을 이용해 이를 해결한 뒤로는 양피지나 독피지가 장악한 시장 수요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양피지나 독피지는 종이보다 원료 공급 문제가 더 크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힘들었고, 따라서 종이라는 대체제의 수요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무엇보다 12세기 유럽에 대학들이 등장하고 14세기부터 양피지의 수요가 폭발하게 되자, 기록용 매개의 부족은 종이의 수요를 촉진했습니다. 원료가 원활하게 공급되고, 제조시설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며, 시장의 수요가 지속되다 보니 유럽의 제지산업은 점점 확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서는 라틴어 대신 모국어를 채용하는 저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노동의 시장화 영향으로 문자해독률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으로 인한 자국어 매체 수요의 증가 등으로 도서 수요의 증가에 힘입어 제지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계몽주의시대를 거쳐 '종이의 시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3.
그렇다 보니 한국의 제지산업, 특히나 조선시대의 제지산업의 양상과 출판의 상관성을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성호의 『서점의 시대』에 기술된 정도만으로는 몹시 부족했습니다. 무엇보다 '국뽕 한 사발'이라도 들이킨 듯한 '한지 예찬론'의 도시인 원주(아마 전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긴 합니다)에서 유년시절을 보낸지라, 한지가 몹시나 우수한 종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세계적인 명성은 일본의 와시(和紙)가 더 높다는 현실을 경험한 뒤라, 이 책의 리뷰를 접하고 읽어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1장과 2장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기대하고 있었던 정보들을 얻을 수는 있었습니다.
부산대 강명관 교수가 국가기록원의 사보에 기고했던 짧은 글에서 왜 조선시대 책값이 비쌌는지, 종이값은 왜 비쌌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는데, 이 책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원재료인 닥나무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산량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노동집약적인 제지산업 내에서 장인의 지위가 너무 낮아 시장이 성장할 수도 없었다는 점, 무엇보다 지식의 유통을 가로막았던 조선의 지배층의 편견이 수요마저 억누르고 있었다는 점이 큰 한계로 작용했다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3에서부터는... 아무래도 그저 경제사회사로 넘어가 버린 수준이라서, 굳이 더 읽어야 하나 싶어 졌습니다. 꾸역꾸역 4장까지 읽다가, 결국 5장은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기고 책장을 덮었습니다.
4.
리뷰를 정리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강명관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를 꼭 읽어봐야겠다 싶습니다. 다음 달 중순쯤에는 원주한지테파크를 좀 둘러보기도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