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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혼자

자기만의 방, 이 방을 갖기까지 일 년

by 박다짐

*이 글은 2020년 4월 시작해 끝맺지 못했으므로 당시의 근황과 심리상태를 대변한다.


작업실을 구했다. 구했다기보다는 빌렸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여기는 살림집을 공유 작업실로 개조한 곳인데 나는 가벽과 광목커튼으로 분리된, 여섯 조각을 내기 전엔 제법 넓은 거실이었을 공간의 한켠을 사용한다.

올해 들어 잦은 주기로 찾아오는 우울감을 떨치기 위해 혼자만의 공간을 막연히 바랐다. 멍하니 길을 걷다 통유리에 '임대' 쪽지가 붙은 작은 가게가 보이면 괜히 한 번 뒤돌아보던 것도 요 근래의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 뭘 해서 비용 부담을 하지? 목적을 알 수 없는 바람은 희망사항일 뿐이라 발길까지 돌리진 못한 채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집을 가장 편한 장소라 믿었다. 남의 집 구경이 재밌고 여행지의 숙소 선택에 고심하지만 미지의 호기심이 호감으로 바뀌고 여기 참 좋네 싶은 때가 오면 어김없이 떠나온 집이 그리웠다. 내 집, 어이와 무이가 기다리는 우리 집. 내 생활이 적절하게 묻어있는 집. 내 취향이 얼기설기 어질러져 있는 집. 나 없는 빈 집. 별볼일 없는 그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조바심에 급격히 시름시름하다 날이 밝는 순간 버스 정류장으로 뛰쳐나간 적이 몇 번이던가.

어떤 공간, 특히 방에 대한 나의 애착은 오래되었다.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던 열한살 때가 시작이었을 거다.

가운데 벽을 터 방문이 두 개나 되는 길쭉하고 커다란 방. 욕심 많은 나는 언니보다 큰 방을 차지했다.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가구로 채워졌다. 언니와 오르락내리락하던 이층 침대가 사라지고 둥그런 헤드를 가진 싱글 침대가 생겼다. 책상은 침대와 세트로, 저쪽 벽에는 유행을 타지 않을 것 같은 갤러리 옷장이 새로 들어왔다. 큰 가구 세 개를 들여놓아도 맨바닥의 면적이 널찍하게 드러나는 방에 혼자 앉아 있으면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한 마디로 사적인 영역이 주는 편안한 고립감은 내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한방에 몰아주었다. 나는 학기 초마다 긴장감으로 온몸에 열이 나던 아이였으나 최초의 방을 가졌던 그때만큼은 믿을 수 없이 활발했고 친구들과도 두루두루 잘 섞여 지냈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방, 혼자 골몰할 수 있는 방이 있어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번듯한 방을 갖춘 집을 갖기 위한 과정은 몰랐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시작했다.

그러다 IMF가 터졌다. 내 첫 번째 방과는 안녕이었다. 좁은 평수로 이사를 가고 가구를 욱여넣고 피아노를 팔았다. 그렇다, 우리 집은 단단히 망했다. 두 분 모두 성실히, 열심히 일했음에도 그랬다. 좁은 집에서 더 좁은 집, 더 좁은 집에서 더 더 좁은 집으로, 스무 살 언저리까리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하지만 이 이상 어떻게 더 기우냐 싶을 정도로 가세가 급경사 칠 때조차 혼자만의 공간은 건사했으니 나는 운이 좋았던 편인 것 같다. 가출한 언니, 고향 가까이 새 터를 잡은 부모님, 이런 걸 운이 좋았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가정사 문제이므로 운 운운은 이쯤하기로 하고.

덩그러니 빈 집에 남은 나는 혼자서 잘 먹고 잘 살았을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한겨울 기름보일러 값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부모님의 단칸방 너머 낡은 싱크대 앞에 두툼한 요를 깔게 된다... 불편하진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오롯이 혼자가 될 수 있었고, 그때의 마음가짐은 공간의 확보라기보다 서울 입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게다가 현관을 열면 마당이 보였다. 작은 시멘트 마당이지만 아빠가 싱싱하게 가꾸어놓은 고추와 상추가 있었고 그 옆엔 24시간 파란 파라솔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빗물로 얼룩진 담벼락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훌라후프를 돌리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그 마당이 나만의 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떠올려도 아늑한 기억만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염원하던 상경은 성공적이었다. 서울이 아니라 안산이었지만 그게 어디야. 그건 정말 운이 좋았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학교에 입학한 뒤 여실히 알게 된 사실이다.

원룸도 구했다. 다시 돌아온 언니와 나눠 쓰는 방이었지만 우리 자매는 사이 좋게 외박을 자처했다.

2인 1실인 기숙사에 입실하며 만난 나의 첫 룸메이트는 학보사니 동아리니 꼭두새벽부터 밖으로 나돌다가 늦은 밤 돌아와 "불을 꺼도 될까요." 하고 겨우 한 마디를 건네는 사려 깊은 친구였다.

물론 룸메이트 변동이 있었다. 심경의 변동 또한. 내가 몇 차례의 룸메이트 변동으로 느낀 바는 오로지 하나, 첫 룸메이트의 투명함이었다. 그녀와 나 사이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는 당신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그렇게 해주세요.

다음 학기 배정된 룸메이트와 인사도 나누기 전에 화장실 변기에서 생리혈을 발견한 나는 그 길로 기숙사비를 환불 받아 6개월치 옥탑방 비용으로 지불했다. 혼자라서 더없이 완전한 날들이었다. 내가 나로 채워지는 충만한 공간에서 외로울 틈 없었다.

내 인생의 번외 격인 3개월간의 시골살이, 취업과 독립, 작은 원룸에서 시작해 조금씩 평형을 넓힌 30대의 서막, 1인 가구의 정점이 될 줄 알았던 제주 이주가 무산되고 난 후 찾아온 ㅁ과의 공동생활 등등, 애인의 유무와는 별개로 어디에 누구와 있든 나는 그저 본능적으로 '혼자'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나의 성장은 늘 방과 함께였다. 내가 머무는 공간 가까이 자리한 물건들이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ㅁ과의 공동생활 끝에 홀로 지낼 공간으로 이 집을 낙점하곤 드디어, 오 드디어, 그런 마음이었다. <도쿄일인생활>, <집의 즐거움> 같은 책들을 괜히 정독하면서 독립생활에 이제 막 첫 발을 뗀 사람처럼 설레고 들떴더랬다. 그런 면에서 영감의 합류는 애석하게도 찬물일 수밖에 없었다. 영감은 내가 먼저 같이 살자고 얘길 꺼냈다는데 와 나는 정말 그런 기억이 없고, 있다 해도 빈말이었겠지. 진짜 따라올 줄 알았겠니.

아무튼 예기치 않게 결정된 영감과의 동거는 둘임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만족스러웠다. 영감은 내가 보다 많은 시간을 혼자 쓰길 바라는 사람이라 쿵짝이 잘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는 잠잘 때와 식사 때를 제외하면 각자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져 있고 그러는 와중에 방앗간집 들리듯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반가워한다.

여기까지는 코로나19 전의 이야기.


자발적 감금상태가 된 요즘은 집을 견디지 못해 하루가 멀다 하고 침울해졌다. 개인과 개인의 삶이 종일 포개어진 공간에는 경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혼자 있을 낮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 시간을 보충하려 영감이 잠든 새벽을 활용하면 낮 동안은 깊은 잠에 빠져 허우적대고 늦잠을 자고 나면 하루가 날아가버렸다는 자책과 더불어 무력감에 젖어들었다. 오후 세네시가 넘어 깼는데도 언제 나갔는지 모를 영감이 연락 한 통 없을 때면 순간적인 열이 뻗쳤다. 부랴부랴 집안일을 끝내놓으면 어느새 영감이 돌아올 시간... 이제 좀 느긋하게 혼자만의 여유를 누리고 싶지만 저녁을 먹고 나면 영감은 또 다시 우당탕탕 몬스터와의 전쟁... 그럼 나도 책 대신 티비를 켜고 볼륨을 최대로 올리는 것이었다...

점점 이사 생각만 간절해졌다. 방 한 칸만 더 있다면 영감이랑 각자 자기방 하나씩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뿐이야, 정리가 수월해지고 동선에 여유도 생기겠지, 방 세 칸이 여의치 않으면 무턱대고 침대에 드러눕지 않게 조그만 소파를 놓을 만한 거실이라도, 어무이 캣타워도 다시 들이고 싶고, 신혼부부 전세대출을 받으면 집세도 줄어들 텐데 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부동산 어플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사이 친구들은 우르르 이사를 했다. 망원동 토박이가 되는가 싶었던 0이 서울을 떠났고 0이 떠난 마포구엔 1이 새로운 주민으로 합류했다. 2는 더 멀리 울산으로 갔다. 피아노 선생님 겸 동네 친구로 바짝 친밀해지기 시작한 3은 일산으로 이사가 결정되었다. 4는 집과 책방, 두 군데의 이사를 한꺼번에 진행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눈치였다.

이들의 얼굴을 오래 보지 못해서, 거리낌 없이 만나러 갈 수가 없어서, 그래서 축축 처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사실 그건 우울의 진짜 원인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떠나서 아쉬운 마음 못지않게 부러운 마음이 컸다. 일부러 친구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못난 마음에 모까지 날까봐. 애초에 마음을 나눌 처지가 못 되었던 것이다.

뾰족한 화살은 영감한테 겨누었다. 영감이 내 에너지를 끌어올리려 나름대로 애썼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옆방에서 웃고 떠드는 영감 목소리에 갑작스럽게 외로움이 사무치면서 눈물이 후두둑. 아 다 부질 없다, 죽어 버릴까.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전개야, 지금 돌이켜보면 말 같지도 않게 황당하지만 당시는 정말 절박한 심정이었다.

울적함이 한계치에 도달했음을 느끼며 가장 필요로 했던 것, 그건 '자기만의 방'이었다. 고요히 있을 수 있는 나만의 영역. 그럼 전부 해결될 것 같았다. 그게 뭐든.

발품 한 번 없이 부동산 앱에만 의지하고 있던 사이 우리 집의 만기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시기나 현실적 여건 등 여러 가지 정황상 우리 집 이사는 미루기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도 나는 티비를 크게 틀고 습관적으로 매물을 검색했다.


어느 날 영감은 내가 다른 집과 우리 집을 비교하고 자기한테 쓸데없이 시비를 거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다고 했다. 영감답지 않게 진지하고 근엄한 말투였다.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나중에 영감 말을 곱씹을수록 간파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졌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그동안 영감이 영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래, 한 번 보자. 우울이 먼저였을까, 나태가 먼저였을까. 나는 각성이 빠른 편이라서 답도 빨리 나왔다. 나는 무작정 내 공간을 찾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물론 환경이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내 경우엔, 마음을 먼저 다질 때 환경에도 좋은 기운이 퍼진다. 방을 늘릴 수 없다면 방을 만들자. 그렇게 현재의 작업실에 이른 것이다.

공간을 찾다가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공유 작업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음 같아선 아예 원룸 같은 데를 임대하고 싶었으나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몇 가지 떠올려보니 원룸은 실격. 일단 비용이 많이 든다. 보증금도 월세도. 내 공간이 생기면 가꾸고 싶어질 테고 하나 둘 채우다 보면 그게 다 돈이지. 인터넷도 새로 설치해야 되고, 쓰는 만큼 공과금도 납부해야 한다. 이 모든 쓰임들이 '혼자'에 치르는 값이라 해도 내일부터 이용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바로 괜찮은 곳을 찾았다 한들 한 달 뒤엔 정리하고 싶어지는 거 아냐?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 역시 없다.

'혼자, 가성비, 당장'의 3박자를 갖출 것. 그러자면 공유 작업실이 내가 찾는 조건에 딱이었다. 공유 작업실이지만 아직 작업자가 아무도 없고, 피아노 학원 레슨비 정도의 부담 없는 쉐어비용(학원은 코로나로 휴원 중), 준비된 책상과 의자, 조명, 인터넷 설치 완비, 에어컨 설치 예정, 당장 몸만 들어가도 무방하며 한 달 뒤 마음이 바뀌어도 가볍게 나올 수 있다.


작업실을 둘러보고 돌아온 저녁, 영감 앞에 서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눈물은 뭐랄까. 그냥, 다시 나로 돌아와서 다행이다,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다녀왔어, 같은.

바로 다음날부터 작업실 체크인이 시작되었다. 책가방을 잔뜩 싸갔지만 특별히 작업이랄 건 없다... 그저 고요하고 휑한 곳에서 멍하니 앉아 있거나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다가 온다. 가끔 글도 쓰긴 하는데 오래 가진 않는다.

우울감은 하루만에 퇴치되었다. 나에게 필요한 '자기만의 방'은 면적으로서의 방이 아닌 온전한 내 자리로 충분했던 것이다. 우연히 티비 채널을 돌리다 <신박한 정리>의 장현성 편을 본 적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그의 아내 양희정의 화장대가 그녀만의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부분. 그녀의 감정을 꺼이꺼이 공감하며 눈물짓고 있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영감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랬던 것이었던 것이야... 하고 답했다. 영감은 갸우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듣더니 엔딩 크레딧의 번개장터 로고를 보자마자 와 어쩌구저쩌구 번개장터의 사업 아이디어에 탄복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한 공간에서 평화롭게 지내려면 필수인 거야, 자기만의 방은, 이라고 말해도 영감은 알아듣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영감에게도 혼자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직 그 필요성을 잘 모를 뿐. 인간의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가 휴식할 줄 모르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내가 한 말 아니야, 팡세가 그랬어, 여보.


총 4개월, 작업실 대여는 8월까지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살아났다. 그리고 행복했다. 내가 얼마나 체크인을 했는가는 비밀로 남겨두겠지만.


(이 글을 썼던 당시에,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방치해두었다. 5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때의 감각이 떠오르면서 내가 많이 성장했구나 싶다. '자기만의 방'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겍는 도움이 되길 바라며 에라이 몰라 하는 마음으로 업로드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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