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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Nov 19. 2018

디제이 마마

2009.9.13

8월 말부터 고사동의 온라인 쇼핑몰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 침대맡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을 느꼈다. 엄마다. 직감으로 알았다. 평소처럼 "일어나!"라고 소리치지 않길래 아마도 씨디를 고르나 보다 생각했다. 잠시 후, 내 방에는 '버팔로 66' OST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사실 엄마의 기척을 느낀 후부터 깨어 있었다. 줄곧 긴장한 채였다. 설레는 긴장이었다. 다만 음악이 흐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던 것이다.

제 발로 걸어 나온 나를 보며 엄마는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엄마가 나를 깨우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아빠 핑계를 댔다. 차라리 나는 내 얼굴에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거나 이불을 몽땅 빼앗아버리거나 등짝을 후려치거나 하는 엄마 나름의 독자적인 방법ㅡ극단적이어도 괜찮다ㅡ으로 나를 깨워줬으면 했다. 내가 몸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가 단지 아빠한테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몸이 가뿐하다 해도 심술부터 났다.

"뭐 다른 방법 없어?"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잖아. 나도 포기야."

"음악 틀라니까."

몇 번을 얘기했었다. 그런데도 다음날이면 여지없이 아빠 핑계였다. 그런 엄마가 드디어 방식을 바꾼 것이다.

"자, 봤지?"

"진짜 일어난 거 맞아?"

일어나 거실로 나왔건만 의심하고 있다.

"어. 진짜. 오늘부터 엄마 내 전용 디제이 해."

그날 나는 씨디플레이어에 버팔로66 OST를 넣고 집을 나섰다.


이튿날 아침, 엄마는 '원스' OST를 틀었다. 벌떡 일어나 기타를 잡았다. 'Falling Slowly'를 어설프게나마 따라 쳤다. 엄마는 감탄했다! (하하하)

씨디피 속 씨디는 버팔로66에서 원스로 바뀌었다.

이틀간 엄마의 선곡 패턴을 지켜본 결과 다음은 '이토록 뜨거운 순간' OST를 선택할 것이 분명했다. 부스럭거리기는 했으나 결국 엄마는 내가 정렬해놓은 순서대로 음악을 틀고 있었던 것이다. 침대에 눕기 전, 나는 '아마츄어증폭기' 씨디에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금자탑 꿈을 꾸면서 잠에서 깼다.

엄마는 노래가 왜 이러냐고 하면서 '금자탑'을 따라 불렀다. 당신은 외로운 별 아닌가요오오오. 뒷부분에 오오오를 강조했다. '폰팅할까요'에서 따르릉 소리가 울리자, "총명아, 전화 왔다" 시답잖은 농담도 던졌다.

"딴 거 틀을까?"

아무래도 엄마는 아마츄어증폭기를 들어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디제이 맘대로."

이번에 엄마는 '푸른새벽'을 골랐다. 나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호접지몽'을 듣자마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와,

"엄마, 센스 있다!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걸 틀었어?"

그랬더니 엄마는,

"바보야, 저기 있는 게 다 너가 좋아하는 거지."

당연하다. 내가 좋아서 산 음반들이니 엄마가 뭘 틀어도 듣기 좋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엄마의 선곡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직접 튼 음악과 엄마가 골라주는 음악은 같은 곡일지언정 다른 느낌이다. 엄마가 틀어준 쪽이 훨씬 더 좋다.

출근하는 길에는 아마츄어증폭기를, 퇴근하는 길에는 푸른새벽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는 아무것도 틀지 않았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3일 만에 관둬버렸으므로. 엄마는 다시 아빠 핑계로 날 짜증 나게 하고 말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음악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누구 맘대로 디제이 관두랬어."

내 방에 들어온 엄마한테 따졌다. 이제부턴 엄마랑 같이 일하기로 뜻을 굽혔기 때문에 조금 떳떳한 상태였다.

"알았어. 복직이다."

엄마는 다시 디제이를 시작했다. 월요일은 뮤즈를, 화요일엔 카메라 옵스큐라를, 수요일엔 2046 OST를, 목요일엔 다시 카메라 옵스큐라를, 금요일엔 로라 베어스를 틀었다. 토요일엔 소문을 들은 아빠까지 합세하여 푸른새벽의 다른 음반을 틀었다.

"엄마가 생각을 해봤는데, 너가 듣는 음악들의 공통점을 찾았어."

대단한 걸 발견했다는 듯 엄마가 소곤거렸다.

"뭔데?"

"하나같이, 야리야리하게, 귀신 소리 같은 게..."

"귀신? 몽환적이야?"

"어, 몽환적." 엄마는 이어 말했다. "너가 왜 그렇게 벌떡 일어나는가도 생각해봤는데."

"어, 뭔데?"

"자고 있는 영혼을 불러내는 것 같애. 그 귀신들이."

푸하하. 엄마는 정말 진지했다. 귀여운 디제이, 마마. 내일도 모레도 당신 곁에 있는 동안 잘 부탁해요. 덕분에 씨디를 꾸준히 구입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얏호, 벌써 세 개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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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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