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과거의 실패담을 늘어놓는 것만큼 지질한 것도 없다. 무용담도 거북한 마당에 실패담은 오죽이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패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로, 지금부터 내가 하게 될 이야기는 지질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서류는 간신히 통과한다 해도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일부 혹은 그 이상을 자연스럽게 발설하는 일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특히 장점이 뭐예요?라는 곤란한 질문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서류상의 장점은 인터넷 어딘가에서 베껴온 누구나의 장점이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 구직자들의 80% 이상은 같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집중력이 높다든가, 일에 있어서만큼은 열정을 다한다든가, 교우관계가 좋다든가, 단점을 장점으로 극복했다든가, 뭐 그밖에 그저 그런 뻔한 얘기들.
이 몸도 서류 조작에 힘입어 그 대열에 껴보고자 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닌걸. 서류상의 뻔뻔함은 온데간데없이 먼산 보고, 말 돌리고, 얼버무리다 보면 스스로가 가엾어지는 지경에 이른다. 나, 정말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걸까 싶어 우울해지는 것이다.
사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실패의 연속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비교적 무난한 학생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모든 것이 엇나갔다. 친구도 없었고 수업에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교복도 마음에 안 들었다. 학교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거라곤 한 가지뿐이었다, 집에 가는 것.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 한창 락에 심취해있었으므로 부모님을 설득하기란 쉬웠다. 반대를 우려해 자퇴 선포 한 달 전부터 <내가 학교를 관둬야만 하는 이유>를 A4 다섯 장 분량에 걸쳐 준비했던 터였다. 나의 앞날에 대해 적어놓은 그 치밀한 기록은 부모님의 눈에는 음악적 열정으로 보였을 것이다.
기타를 배우고 밴드를 시작했다. 하지만 기타 실력이 늘지 않았다. 집에 기타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보컬로 전향했다. 기타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작곡에도 손을 댔다. 역시 금방 포기했다. 화성학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내게 음악가로서의 재능이 없음을 한탄했다. 하지만 끝내 아닌 척했다. 무슨 일해요? 하고 누가 물어올 때 음악 해요,라고 답할 수 있다는 자부심. 그것이 마냥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열일곱 말부터 스물둘 초까지 철저히 음악인이었다. 기타도 치지 않고, 노래도 부르다 말고, 작곡에는 얼씬도 못했지만, 그래도 공공연히 음악인임을 자처했다. 하지만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는 한낱 객기일 뿐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것이리라. 자질은 물론이거니와 미온의 열정도 식은 지 오래였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그것 역시 백 퍼센트 문학에 대한 열정은 아니었다. 순간적인 열망이었다. 예술을 갈망하던 막연함만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 안에 허세가 내포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멋지지 않은가, 작가라니.
일종의 도피로서 문학을 택했다. 남들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을 다니는 것도 아니요,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특별히 하는 공부도 없었다. 음악적 미련을 밀어낸 뒤로 남은 거라곤 검정고시 합격증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나를 신학교에 넣었다. 검정고시 성적과 목사님의 추천만 있으면 됐다. 독실한 아버지의 믿음에 반감이 있었던 것도 있지만 나의 허세가 이름 모를, 인적이 드문, 산기슭 아래 위치한 신학교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나는 그간 밴드 활동을 빌미로 집이 안양에서 전주로 이사 갔음에도 홀로 안양에 남아 있었는데, 학교는 전주 근교에 있었으니, 그것은 곧 독립생활의 청산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단호했다.
강압적 채플만 아니라면 학교 생활은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책은 고교시절 외로움을 감추기 위한 이어폰의 역할을 대체한 장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때의 책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했다기보다는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킬 무언가로 채택되었다. 나는 그것을 문학적 열정으로 변질시켜 도피를 부추겼다. 수도권 대학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버지의 강압에 대항할 합당한 이유가 생기고, 신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당연시된다.
운 좋게 지원한 대학에 들어갔지만 부적응의 나날이었다. 습관적으로 나는 도피를 일삼고 있었다. 너무 쉽게 원하는 걸 얻었다는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고 누구와도 친밀해지지 못했다. 내게 접근해온 사람이 몇 있긴 했다. 그러나 울타리 안에서의 상투적인 관계에 불과했을 뿐 틀을 벗어나면 남남과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학교에서 마주치면 어설피 인사를 나누고, 어설피 무리에 껴서 밥을 먹기도 하고, 술을 마시러 따라가 어설피 앉아있기도 했다. 전혀 즐겁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과 있는 것이 불편했다. 나는 웃지도 않고, 말을 하지도 않고, 게임에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기듯 사람들도 나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피해 학교를 거의 나가지 않았다. 2년 후 아무도 날 몰라보는 조건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야말로 도피였다.
2년이 지나 '안면 있는 사람이 둘 뿐이라 다행이다 싶었는데 둘도 벅차다'는 나의 내밀한 일기는 결코 엄살이 아니다. 뭐라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또 2년이 지났다. 여전하다, 나는. 가난하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내 힘으로 밥 한 끼 사 먹을 여력도 되지 않으니 어렵사리 학교를 마친 지 2개월여 만에 고향에 내려와 처방전이나 입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착도 하기 전에 떠나고픈 심리는 무슨 역마살인지, 또다시 나는 도피 준비 중이다.
누군가 장점이 뭐예요?라고 다시 묻는다면, 사실 나, 도망을 잘 다녀요, 라고 고백할 작정이다. 내게 있어 도피는 곧 도약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