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 않은 때를 무리하게 미느라 아팠던 걸지도
지난 월요일, 프리랜서로 지원했던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현재 일하는 직원이 퇴사 예정이라 정규직으로 내근할 수 있냐는 전화였다. 현실적인 여건상 프리랜서보다는 내근직이 안전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면접 참여의사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한 달 만의 연락이었으므로 지원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단순히 출판사라 지원했던 모양인데, 공고를 다시 살펴보니 여러 모로 수상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우선 교정교열 담당자를 구한다는 글이긴 했으나 본문에 해당하는 채용정보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고 하부 카테고리인 담당 업무에만 '출판사의 도서가 읽기 쉽도록 / 교정교열 / 윤문 / 리라이팅을 해주실 편집부 모십니다.'라고 적혀 있다. 또 지원하기로는 근무지가 연신내였지만 문자로 받은 장소는 광명사거리란다.
이전 계획이 있다는 말은 통화할 때 들었다. 하지만 당장 이사할 게 아니라면 왜 현재 근무지로 등록해놓지 않은 거지? 이상한 책을 만드는 곳인가? 가령 19금 책이라든가. 만에 하나 그렇다면 굳이 4년제 학벌이 필요한 이유는 뭐야. 우대사항에 토익 850점 이상은 또 뭐고.
가장 뜬금없는 건 복리후생에 적힌 '회식 강요 안 함, 야근 강요 안 함'이었다. 이런 게 자랑할 만한 복리후생이라고? 회식할 돈이 아깝거나 야근수당을 안 준다는 얘긴 아니고?
서둘러 공고 창을 끄고 포털에 출판사 이름을 검색해봤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뭐지, 유령회사인가.
갸우뚱거리는 와중에 브런치 작가로 승인되었다는 알람이 왔다. 들뜨고 기쁜 마음이 앞서 회사에 대한 물음표는 나중에 해결하기로 했다. 어차피 면접은 금요일이니까 그때까진 뭐 더 알아볼 시간이 있겠지.
다음 날 수상쩍은 이 출판사의 윤곽이 조금 드러났다. 출간 목록을 확인해보니 우려와는 다르게 제법 멀쩡히 굴러가는 출판사인 듯했다. 실체는 직접 확인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물음표를 찍었던 마음은 느낌표로 살짝 꼿꼿해졌다.
오후에 면접을 보고 돌아왔다.
나갈 준비를 하며 스타킹을 신었는데 엄지발가락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신발로 가려지는 엄지발가락의 구멍 따위, 보일 일이 없을 게 당연한데도 혹시나 싶어 뒤집어 신었다. 혹시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역시나였다.
단층짜리 일반주택의 철문 너머로 세 개의 현관문이 보였다. 그중 가운데 집이 오늘 내가 면접 볼 장소이자 채용된다면 근무하게 될 환경이었다. 용도가 사무실인 그 집은 내 남자 친구의 작은 원룸보다 못한 허름한 방이었고 내가 정말 질색하는 벽지에 노란 장판이 깔려 있었다. 블라인드 하나 없는 창문에는 빛도 거의 스미지 않아 형광등을 켰는데도 방 전체가 어두침침했다. 어쩌면 이런 장소일 수 있다고, 스타킹을 뒤집어 신을 때 예견했던 것 같다. 그래서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현관문은 차마 닫지 못했다. 한쪽 벽면이 두 사람이 쓰는 책상으로 꽉 찰 만큼 협소한 공간에 퇴사 예정이라는 직원은 출장을 나간 상태였고, 그렇다면 남자 대표와 나, 단 둘이 골방 같은 이 방에서 면접을 본다는 뜻이었다. 내가 깜빡 잊은 척 문을 열어둔 게 겸연쩍었는지 대표는 그냥 둬도 된다며 허허 웃었다. 그러곤 두 개뿐인 의자 중 하나를 내게 권하고 자신도 나머지 의자에 앉았다.
웃음소리부터 괴짜 같은 느낌이 풍기는 사람이었다. 대표가 등 뒤의 냉장고에서 부산스럽게 비타민 음료 박스를 꺼내 까는 걸 지켜보다가 쭈뼛쭈뼛 마주 앉았을 때는 이 상황이 마치 어설픈 탐정소설의 도입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면접이라는 인상 없이 40여 분간 수다를 떨었다. 말을 많이 한 건 대표 쪽이었지만 업무적인 부분과 출판시장에 관한 이야기라서 귀 기울여 듣고 이따금 한 마디씩 거들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연봉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즈음 이미 나는 조건이나 환경을 따지지 않고 같이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함께 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나 다음에 면접 볼 사람이 먼 거리를 문제 삼아 그냥 돌아갔다는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 같고, 내 추측으로는 이 출판사의 외관에 아연실색해서 도망갔을 가능성이 크지 싶다. 불과 몇 주 전 나도 그랬었다. 어떤 광고대행사에서 면접을 보기로 해놓고 동태를 살피는 심정으로 한참 일찍 도착해서는, 그 빌딩이 내뿜는 흉물스러움에 당황한 나머지 불참 문자를 보냈었다. 철없는 행동인 건 알지만 내 기준으로 담당업무가 내키지 않으면 공간이라도 마음에 들어야 하기에 일도 공간도 답이 없는 그곳에서는 면접조차 시간낭비 같았다. 물론 이런 나를 채용하는 멍청이는 없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이곳이라면 나는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정교열 일보다는 잡무가 많을 거란 이야기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인 출판사에서 필요한 모든 경험을 오히려 돈을 받으며 축적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면 짠내 나는 월급도 적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표는 아까, 함께 하자는 말 전에 이 정도 월급이어도 괜찮냐고 먼저 물었다. 상관없다고 말한 걸 충분하다고 정정하고 싶다. 비록 이 출판사가 겉보기엔 흉물스러움의 끝판왕일지 몰라도 내가 내실을 다지고 발전하는 데 있어선 안성맞춤일 거란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도 편달 부탁드린다는 메시지에 '지도 편달할 역량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성장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됩시다'라고 회신을 주는 대표라면 신뢰를 가지고 오래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면접이 끝난 뒤 대표는 본인이 썼다는 책을 건넸다. 그 책은 내가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목록들 중 단연 흥미를 느낀 책이었다. <때를 기다려>라는 표제가 좋았다. 챕터마다 말장난 같은 소제목에 간결하고 평범한 문장들로 구성된 에세이인데 '때를 기다려'의 전문은 이렇다.
차근차근
때를 기다려.
기다림은 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
불지 않은 때를 미는 것만큼 아픈 건 없거든.
솔직한 감상으론 다소 밋밋하고 손발이 오글거리는 느낌이다. 그래도 담긴 의미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과 더불어 나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동안 불지 않은 때를 무리하게 미느라 아팠던 걸지도 모른다. 살결이 말랑해지고 글이 말랑해지고 내면이 말랑해질 수 있도록 때를 기다리며 몽글몽글 잘 불리는 데 근성을 가져보려 한다.
첫 때로, 일단은 출근일을 기다리고 있다. 그전에 목욕탕에나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