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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Dec 17. 2017

오늘의 빙의

수수하지만 굉장해! 코노 에츠코에 빙의된 나날들

밤낮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패턴을 갈아엎으려고 첫 출근을 이틀 앞두고 밤새도록 일본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 제목은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서점 광고 메일을 클릭했다가 <교열걸>이라는 책을 접했는데 제목을 보자마자 출판사 얘기구나 싶어 구미가 확 당겼다. 책 소개를 보니 일본 인기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란다. 나는 원작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마침 날을 꼬박 새도 좋을 만큼 푹 빠져들 드라마를 찾고 있던 터라 곧바로 시청 모드에 들어갔다.


1화는 패션지 에디터를 지망하는 코노 에츠코가 고교시절부터 동경하던 잡지 '랏시'의 편집자가 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발걸음부터 경쾌한 그녀는 여러 명의 면접관들 앞에서 주눅 드는 기색 하나 없이 예쁘고 당돌한 데다 따박따박 말도 잘 한다. 치고 빠지는 타이밍 또한 기가 막히다. 

수차례의 면접에 도가 튼 걸까. 아니다. 만일 내가 에츠코라면 애초에 일곱 번이나 같은 회사에 지원할 용기는 내지 못했을 것 같다. 열정도 사그라들었을지 모른다. 용기와 열정을 두루 갖춘 자 코노 에츠코였으니 꿈의 직장 경범사의 합격 통지를 쟁취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현실은 생기발랄 랏시의 편집부가 아닌 음습한 느낌이 감도는 교열부. 심지어 지하 1층 끝 방이다. 사무실 분위기는 물론 교열부에 속한 직원들은 그녀의 눈에 하나 같이 칙칙해 보이고, 코노 에츠코를 줄이면 코에츠(일본어로 교열을 뜻함)라는 부장의 농담도 황당하기만 하다. 교열의 중요성 따윈 안중에도 없고 업무를 설명하는 선배 교열자의 구식 정장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에츠코짱. 

드라마는 이런 코노 에츠코가 부서 이동을 한 줄기 희망으로 삼으며 교열걸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안에 로맨스는 덤이라고나 할까. 


줄거리는 이쯤 하기로 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업무적인 부분에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잡지 에디터를 할 때도 교정교열은 내 전담이었고, 에디터를 그만둔 후로는 교열자로 3~4년 일했기 때문에 몰입이 쉬웠다. 다만 나는 과거에 소극적인 교열자였다. 내근직일 때는 교열과 관련해서 원작자와 의견을 주고받는 일이 수월했지만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늘 한계에 부딪혔다. 대면하지 않고 원고로만 소통하는 식이라, 애써 교정을 봐서 원고를 넘겼는데 반영되지 않으면 헛수고를 한 것 같아 시무룩해지고 심혈을 기울여 수정한 글이 온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 될 때면 힘이 빠졌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교열은 스스로 유령이 되는 일이자 혼자서 앓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그랬다. 그렇다고 적당히 하는 것도 어려웠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했으나 막상 털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일 자체로 볼 때, 교정교열은 글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이고 그래서 매력적인 일이다. 내가 드러나야 한다는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된다. 화려한 주인공 뒤에 감칠맛 나는 조연이 있듯이 교열은 그렇게 수수하지만 굉장한 조력자인 셈이다. 코에츠 덕분에 나는 빨리 교열 일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해졌다.


요즘 나는 그야말로 코노 에츠코에 빙의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담당 부서는 편집부지만 직원이 한 명뿐인 우리 출판사에서는 교열까지 주 업무에 포함된다. 어디 교열뿐이랴, 외부 영업도 (자진해서) 따라다니고 온라인 마케팅도 한다. (대표님이 더 편해지려면) 포토샵에 익숙해져야 하고, (내가 더 편해지려면) 사무실도 빼야 한다. 앞으로는 주문서를 발주하는 것부터 거래명세표를 정리하는 일까지 도맡아야 한다. 얼마 전에는 대표를 닦달해서 명함 디자인을 바꿨다(얼떨결에 편집부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고대하던 책 작업에 들어갔다. 

지난 월요일 신도림에서 작가와 디자이너를 만나 책에 부연할 샘플 원고를 전달하고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준비하는 책은 성에 대한 것인데 자리를 옮기며 옆에 있는 에메랄드빛 식당의 외관을 보자마자 단번에 예카테리나 궁전이 떠올랐다. 돌아가는 길, 구로기계상가 쪽을 걸어가다가 발견한 둥근 첨탑 모양의 예식장도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벌써부터 직업병 같은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어느 피로한 날, 코노처럼 잠꼬대로 이 성 저 성을 줄줄이 읊을지도 모르겠다.  


현재는 초고 작업이 한창이라 새로운 성을 조사할 때마다 가보고 싶은 나라가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글의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다. 인터넷에 의존한 채 워낙 방대한 자료를 줄이다 보니 의문점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대사에 교열 일은 문자 하나라도 의문을 품어야 한다고 나온다. 일단 의문이 들면 설령 제삼자가 옳다고 해도 자기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직 나는 업무적인 역량에 있어 배워야 할 게 더 많은 사람이다. 책이 출간된 후에 행여나 항의 전화를 받을까 봐 긴장하는 일 없도록 각 나라 관광청에라도 발품을 팔아봐야겠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깔끔하게 인쇄된 새 명함과 한 주 작업한 원고가 나란히 놓여 있다. 장전은 완료되었고 11일을 일해본 나의 소감은 드라마 제목으로 대신하련다. 수수하지만 굉장해!


덧1. 미래로 열린 문은 하나뿐이 아닙니다. (틈틈이 내 글도 쓰겠습니다.)

덧2. 직장 만족도는 90%. 나머지 10%는 내 몫(패션)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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