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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Feb 22. 2018

오늘의 스웨터

시간을 정돈하는 방식

어느덧 직장생활 3개월 차다. 지난번 글에서 직장 만족도가 90%, 나머지 10%는 패션으로 남겨두겠다고 썼다. 지금은 어떤가 하면 만족도는 현저히 떨어지고 패션은 점점 답이 없어지고 있다. 

시간 때문이다. 잠을 이길 의지가 제로에 가까운 나는 10시 출근조차 힘에 겨워 쩔쩔맨다. 3분만 더, 5분만 더 하다 보면 시간이 임박해 허둥지둥 나갈 채비를 하게 되고 심한 날은 에라이 때려치워, 의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 치명적인 늦잠을 자고 만다. 패션이고 나발이고 전날 옷차림에서 상의만 부랴부랴 갈아입고서 패딩을 입고 뛰쳐나가는 살풍경.

일요일 밤을 남자 친구와 보낸 다음 날, 갑작스럽게 매서워진 날씨에 원피스와 코트(데이트라고 멋을 부렸다.)를 벗어던지고 외투는 물론 티셔츠와 청바지까지 남자 친구 옷으로 중무장한 적이 있는데 이 정도는 양반이다. 두어 번은 잘 때 입은 트레이닝복을 그대로 입고 출근하기도 했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지만 양치질은커녕 세수를 하지 않은 날도...


적성은 논외로 치고 일이 피로를 누적시키는 노동임을 깨닫는 순간은 퇴근 이후다. 몸이 축 늘어져 만사가 귀찮아지는 거다. 더욱이 나는 체력이 약해서 면역력이 떨어지면 줄줄이 잔병이 따라붙는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 감기에 걸려 끝 모를 기침을 내뱉고 방광염에 걸리는가 하면 3일 연속 코피를 쏟았다. 코피가 처음 났을 때 놀라기보다 신이 났다. 태어나 처음 흘려본 코피였고 한 번쯤은 코피를 흘려보고 싶다는 로망을 나는 남몰래 품고 있었다. 코피가 났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해댄 건 한편으론 내가 그만큼 치열하게 일했으니 칭찬해달라는 어리광이기도 했다. 하지만 육체로 드러난 피로감은 정신적 피로를 몰고 오며 나의 평정심을 무너뜨렸다.


긴 하루를 마감하고 돌아온 집은 아비규환. 고양이 세 마리가 다리를 휘감고선 어서 밥을 대령하라 이끄는 곳엔 물그릇마저 바짝 말라 있고 걸음마다 펠렛 조각이 밟혔다. 먼저 귀가한 ㅇ의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워기 방향 조절에 번번이 실패하는 그녀로 말미암아 화장실 문밖 바닥 새어 나온 물이 흥건했다.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는 싱크대에서 간단히 손을 씻고 고양이들의 사료와 물을 챙겼다. 다 말라 버석해진 빨래는 며칠째 건조대에 걸려 있다. 욱 하는 감정이 용솟음치며 오기가 생긴 나는 현관 앞에 방치된 20Kg짜리 펠렛을 기어이 끌고 들어왔다. 

봉투를 뜯어 한 움큼씩 큰 통에 옮겨 담는데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아마 화장실 안에도 밀린 빨래가 잔뜩 있겠지. 고양이 화장실은 또 어떻고.

마침 화장실에서 나온 ㅇ가 우는 내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시간이 없어. 내 시간이 없어.


내게 있어 혼자 살고 싶은 열망은 시간을 내 뜻대로 정돈하고 싶다는 의미다. 낡고 오래된 집이라도 쾌적하고 안락한 실내를 유지하면서 한 사람 몫의 집안일과 두 마리의 고양이를 돌보는 일이 마무리되면 나머지 시간은 나를 위해 쓰는 거다. 짧은 일기나 엽서를 쓰고 가끔은 영화를 보고 잠들기 전엔 책 몇 장 읽을 수 있는 감수성 발화의 시간이 내겐 반드시 필요했다. 그게 내가 시간을 정돈하는 방식이리라. 그런 시간을 오래 혼자 가져왔으므로 다시 혼자 살게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혹 엉망진창인 날이 찾아올지언정 다른 사람 탓을 할 필요가 없는 환경이라는 점에서 나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집안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집안일도 꽤 요령 있게(느리지만) 하는 편이고 습관적으로 정리정돈이 몸에 배어 있다. 시간이 넘쳐나는 백수 시절에는 시간이 없는 ㅇ를 대신해 살림을 하고 그 방에 가지런히 갠 속옷이며 양말을 가져다 놓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래서인지 직장인이 된 후에도 내 쪽으로 좀 더 기운 살림의 비중에 큰 불평을 갖지 않았다. 

그녀가 채워주는 부분들 또한 컸다. 가령 무거운 짐을 들어준다든가, 세탁물을 수거해준다든가, 정갈한 끼니를 준비해준다든가, 신선한 커피를 내려준다든가, 생수 뚜껑 돌리기나 캔 따기 같은 걸 해준다든가, 무른 포도를 고객센터에 따져 환불해준다든가, 마사지를 해준다든가, 밤새 손을 주물러준다든가.

자잘한 것들이지만 그녀가 주는 사소한 기쁨은 셀 수 없이 많고 나를 자주, 큰 소리로 웃게 한다. (분노로 폭발하는 감정까지 포함해서, 나는 ㅇ와 나의 관계가 약간 부부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떨군 눈물의 경위를 파악하자마자 이 무거운 걸 어떻게 가져왔냐고, ㅇ는 봉투를 번쩍 들어 통에 쏟아부었다. 나는 괜히 더 훌쩍거리며 그녀의 듬직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환경미화에 신경 쓰겠다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애초에 살림의 비중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좀 더 어수선한 것에 민감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는 속도가 한 발 앞설 뿐이다. 분량의 차이일 뿐 설거지 거리 속엔 내가 먹은 식기가 섞여 있고 빨래도 마찬가지다. 고양이 화장실 청소는 내가 전담하지만 나의 잦은 외박은 아침마다 고양이들을 챙겨줄 그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누가 억지로 시킨 일도 아닌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기보다 힘들 때 힘들다고 투정하고 "니가 좀 해!" 윽박을 질러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걸 받아줄 사람이 있는 것으로 된다. 육체적 피로는 회복하는 시간이 더딘 경우가 많지만 정신의 피로는 이렇게 쉽게 회복되기도 한다. 그새 눈물이 쏙 들어갔다.

 

다람쥐처럼 내 옆에 다가와 하루 일과를 종알거리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빈 방의 적막함은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ㅇ와 집안일을 분담하면 내 시간이 생길 것처럼 굴었으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에 있어 나는 게을렀다. 정말 내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그 시간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다시 패션 얘기로 돌아가서, 퇴근 후 대충 집과 고양이를 돌보고 남자 친구와 저녁을 먹고 나면 녹초가 되어버렸다. 패션 테러리스트의 살풍경한 반복이다.


오늘은 일찍부터 외근이 있는 날이라 평소보다 1시간 서둘렀다. 서둘렀음에도 패션에는 변화가 없다. 변화의 유동성은 상의 정도다. 나는 가방 욕심이 많아서 수십 개의 패브릭 가방을 갖고 있는데 첫 출근한 이래로 단 한 번도 가방을 바꾸지 않았다. 바뀌는 건 가방 안에 든 책뿐이다. 얼마 전 완독한 소노 아야코의 책을 한 번 더 읽을까 하다가 외근이 길어질 것 같아 새 책을 하나 더 넣었다.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기획한 '아무튼 시리즈'의 스웨터 편이다. 버스에 올라 가장 끝 페이지부터 펼쳤다. '영원한 다짐의 스웨터, ㅇ 드림. 2018년 2월 11일. Be happy!' 

ㅇ가 주는 사소한 기쁨에는 이런 것도 포함된다. 그녀는 곧잘 산타가 되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상의 역시 ㅇ가 준 카디건 스웨터다.

목동에서 광명으로, 광명에서 구리로, 구리에서 사가정으로, 사가정에서 구의로, 구의에서 미금으로, 미금에서 남대문으로, 남대문에서 잠시 길을 잃고 광화문으로, 광화문에서 목동으로 길고 긴 동선을 따르는 동안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외근의 고단함은 책을 읽는 시간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이렇게 시간을 만든다. 이렇게도 시간을 정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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