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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Jun 30. 2018

오늘의 오지랖

내가 내게 감동받는 순간

글 쓰는 과정이 꿈이라면 표지는 꿈에서 깨는 것이다. <책이 입은 옷>을 펼치자마자 만난 문장이다. 출근길에 슬쩍 책을 펼쳐보곤 오전 내내 저 문장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아름다운 예감이 드는 책이었다.

구입 후 당장 펼쳐봐야 직성이 풀리는 책을 제외하고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읽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럴 땐 나름의 기준으로 책을 선택한다. 물론 별다른 의식 없이 시선이 닿는 대로 혹은 손이 가는 대로 따를 때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는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적절해 보이는 것을 찾는다. <책이 입은 옷>은 그런 의미에서 뜸을 들였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이 책의 순서가 적기였는데 무심결에 <아무튼, 스웨터>를 잡는 바람에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외투>를 연달아 읽었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고 복장 소재의 글을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의복 3종'의 목록이 떠올랐다. 줌파 라히리의 책은 3종 사이에 끼는 것보다 번외 편으로 배치하는 게 어울릴 듯싶었다. 다시 말해, 책이 나를 기다렸다.


마음이 급했다.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요기만 해결하곤 카페에 갔다. 구석 자리에 앉아 알람을 맞춰두고 책을 펼쳤다. 페이지를 넘기고 문자를 쫓을 때마다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싶은 얼굴들이 그려졌다. 때는 내가 출판사에서 편집 작업에 참여한 첫 번째 책의 표지를 받아보기 직전이었고, 전에 같이 일하던 친구를 두 번째 책의 편집 디자이너로 추천해 표지 시안을 받아본 후였다. 와 닿는 구절 중에서 하나를 골라 그 두 사람에게 보냈다. 양쪽 번갈아 메시지를 주고받는 동안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뎌졌다. 그래도 몹시 즐거운 기분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바로 옆 테이블로 중년 여성 넷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가서 보니 2인용 테이블 두 개를 붙여 네 자리를 만들고 있다. 각자의 꾸밈새나 서로 그 꾸밈새를 칭찬하며 오고 가는 말들이 왕왕 보는 사이는 아닌 듯해 나는 재빨리 이어폰을 꼈다. 하지만 그새 신경이 분산되어 눈동자만 글자에 꽂혀있을 뿐 옆 사람들의 움직임이 의식되었다. 이미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나는 좀 짜증이 나서 음악을 끄고 옆 테이블을 흘깃 봤다.


테이블 중앙에 케이크가 올라와 있었다.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모양이었다. 초에 불을 붙인 뒤 아주머니들은 천진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작았고 손뼉에서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갑자기 뭉클해졌다. 책을 읽는 척하면서 몰래 그녀들을 훔쳐봤다. 아주머니 하나가 세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그걸 반복했다.

케이크가 잘리기 전에... 잘리기 전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쑥 말을 걸었다. 제가 다 같이 한 장 찍어드릴까요? 이 말을 내뱉는데 주책맞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하게 덧붙였다. 다 같이 한 번 찍으세요!

아주머니들은 약간 쑥스러워하다가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하나 둘 셋 찰칵. 나는 꽤 여러 장을 찍었다. 가로로도 찍고 세로로도 찍고 사진이 마음에 들게 나왔는지까지 확인을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사진을 돌려보는 그녀들의 얼굴이 하도 해맑아서 나는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카페를 나왔다.  


내가 내게 감동받는 순간이 종종 있다. 우습지만 나는 가끔 나한테 감동한다. 뜬금없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고는 와, 방금 나 감동이다, 하는 식이다.

택시를 불러 낯선 곳에 갔던 어느 날, 너무 친절한 기사님에게 감사해서 내리고 난 뒤에 문자를 보냈는데 내가 쓴 문자가 너무 감동적이라 엉엉 울어버렸다. 부슬비가 내리는 어느 날엔 길가에 엉거주춤 앉아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여자는 우산도 안 쓰고 사방에 흩어진 엽서를 줍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 주웠다. 감동적이다. 어떤 날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다리가 불편해 계단을 힘겨워하는 승객을 부축해 내려드렸다. 감동적이다. 심지어는 번화가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손길을 내치지 않고 받아주는 것조차 감동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좀 전에 책을 읽다가 두 사람을 떠올린 것도 사실 좀 감동이었다.


나는 낯을 가리는 편인데 그런 순간을 떠올려보면 낯이고 뭐고 없다. 모르는 사람한테 대뜸 말도 걸고 오지랖도 잘 부린다. 왜 그럴까. 한동안 나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그런데 최근 팟캐스트를 듣다가 어떤 문장 하나가 마음에 훅 들어왔다. 아마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그 문장은 이랬던 것 같다. 아빠는 착해지는 게 재미있어. 나 역시, 착해지는 게 재미있다. 착해지는 나를 느끼는 게 감동적인 거였다. 하지만, 적당히 나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재미를 떠나 어쩌면 더 쉬울지도 모른다. 매 순간 착해지려는 것도 피곤한 일이므로 평소엔 중간을 유지하려 애쓴다. 착한 마음이 거짓 없이 착할 수 있도록, 나쁜 마음이 작정하고 나빠지지는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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