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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Jul 10. 2018

오늘의 변명

기본을 못합니다

다시 백수다. 회사 이전을 구실 삼아 덩달아 이사해놓고 이전 하루 만에 대표와 삐끗했다. 지각이 발단이었다. 대표는 웃으며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쏘아붙였다. 지각하지 말랬지. 

분위기 파악을 못한 나는 계속 헤헤거렸다. 

대표는 웃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지각하면 잘라버린다. 

내 표정도 일순 굳었다.

그렇다. 나는 지각을 잘 한다. 여기서 '잘'은 빈도가 아닌 스케일을 뜻한다. 빈도야 평범한 수준인 것 같은데 스케일이 황당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일반적인 지각이 기껏 해야 5분, 10분이라면 나는 50분, 1시간, 심하게는 오전을 통으로 날려버린다. 그래서 50초 내지는 1분 사이 간발의 차로 늦어버린 그날은 살짝 억울했다. 50초든 1분이든 지각은 지각임을 인정하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양호한 편의 지각이었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사정이랄 것도 있었다. 반론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게도 할 말이 있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회사는 월요일에 이전을 했고 나는 그보다 이틀 앞선 토요일에 이사를 했다. 

먼저 내 이삿날, 전화로만 예약한 이삿짐센터에서 지긋한 연배의 어르신 두 분이 오셨다. 나는 어르신들의 연배에 당황했고 어르신들은 쌓인 박스를 보곤 기함했다. 일톤 트럭 가지곤 어림도 없다는 거다. 두 분 중 대장 격인 듯한 어르신은 박스는 또 왜 이렇게 무겁게 담았냐며 사람을 더 불러야 한다고 했다. 예산 초과가 짐작되는 대목으로 이사 비용을 지불하기로 한 남자 친구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 친구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괜한 말씨름을 하기 싫었는지 대장 어르신의 주장대로 트럭과 일꾼을 추가하는 데 동의했다.


이때부터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같은 시각, 남자 친구는 나랑 살기 위해(?) 세 달치 월세를 내는 조건으로 혼자 지내던 방을 뺐다. 이미 백만 원 이상의 돈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합의 하에 함께 살기로 했다 쳐도 엄한 돈을 쓴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하여 딴에는 최대한 저렴한 가격으로 이사업체를 선정했던 것인데 그마저 실패할 위기인 것이다. 

큰 박스를 등에 질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는 어르신들을 우두커니 보고만 있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위태위태한 어르신들에게 이건 파손 우려가 있으니 조심해달란 말을 꺼내기도 어렵거니와 작은 짐이나마 도우려 하면 걸리적거린다고 내쳐졌다. 방문하기로 한 코웨이와 도시가스 철거 기사는 깜깜무소식에 고객센터 연결은 아무리 기다려도 되지 않았다. 전기계량기 숫자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수화기 너머로 띄엄띄엄 숫자를 불러주면 그런 수는 절대 나올 수가 없단다. 침착하자, 침착해.

 

트럭에 짐을 다 실을 때까지 철거 기사가 오지 않아 집주인과 다음 세입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새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동선을 둘러본 대장 어르신이 또 혀를 내둘렀다. 사다리차 없이 이 많은 짐을 어떻게 다 올리냐는 거다. 아니 그게, 엘리베이터 없는 2층이라고 말씀드렸었잖아요...

따로 출발한 남자 친구가 곧 도착해 찹쌀도넛과 음료를 돌렸다. 어르신들은, 특히 대장 어르신은 그걸 맛있게 먹고는 사다리차를 불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뭔가 단단히 꼬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야말로 도리가 없었다. 못해, 못해, 하는 대장 어르신을 구슬릴 넉살이나 말재간이 우리에겐 없다. 남자 친구는 정색을 잘하지만 안 먹히면 금방 수긍하는 편이고 나도 정색을 못하진 않지만 땀을 뻘뻘 흘리는 어르신들을 보며 아빠 생각이 자꾸 났다. 어서 빨리 이사를 마치고 어르신들을 댁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서로 얼굴 붉혀봤자 기분 망치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래,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짐을 치웁시다. 


결국 사다리차까지 동원하기로 하고 뿔뿔이 흩어져 사다리차를 기다렸다. 모두가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이었다. 그때 대장 어르신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더니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시켜달란다. 

이사할 때 식사비나 담뱃값 정도야 으쌰으쌰의 차원으로 항상 챙겨드렸고 이번에도 두 사람 몫은 예상하고 있었다. 애초에 플러스알파를 책정해놓는 거다. 그 돈이 적은지 많은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먹는 평범한 한 끼보단 조금 더 얹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산 범위 안에서다. 이번 경우, 예상한 범위를 이사 비용만으로 한참 초과해버렸다. 한 명 식사값 추가되는 것 가지고 뭘, 이라고 여기면 별 거 아니겠으나 이사하며 이것저것 사느라 꽤 많이 지출했다. 통 크게 식사 대접하고 싶은 맘을 세상 물정 모르는 척 꾹 누르고 도너츠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하고 있는 찰나에 네에?

 

하물며 대놓고 식사 요구를 받기는 처음이다. 다른 어르신들은 다들 입맛 없다는데 (아마도 젊은이들 주머니 사정을 염려해서겠지만) 그날의 총대는 대장 어르신이 꽉 지기로 혼자 작정하셨나 보다. 아아 네에, 짜장면 드셔야지요... 짠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간짜장 곱빼기를 시키는 어르신이 얄미워지려고까지 한다. 

그래도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는 정겹고 편안했다.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던 요소들을 다 털어버리고 이제 정말 한 팀이 되었다는, 동료애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사다리차를 통해 창문 안으로 착착 짐이 들어왔다. 막판에 중고 거래한 옷장이 도착해 얼씨구 하고 그것까지 올려버렸다. 대장 어르신이 발 벗고 나서서 옷장의 자리와 수평을 잡아주고 헤어질 땐 난데없이 손도 잡아주셨다. 투박하고 큰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고 애기 손 애기 손 하신다. 아니 왜 이러시나, 눈물 또 핑 돌게.


어르신들이 돌아간 후 인터넷 기사가 오고, 윗집 아주머니가 오고, 코웨이 기사가 오고, 테이블 세트가 오고, 침대도 왔던가 매트리스가 왔던가. 하여간 사람이든 물건이든 수시로 왔다 갔다. 

어느덧 해가 져서 우리는 모든 걸 팽개쳐두고 삼겹살을 먹으러 내려갔다. 하루가 다 갔다.

이튿날, 남자 친구는 출근을 하고 나는 종일 짐 정리를 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오른쪽 손목이 욱씬거렸다. 그렇게 또 하루가 다 갔다.

다음 날이 사무실 이전이었다. 지리를 익힐 여유도 없고 체력도 고갈 상태. 택시를 타고 기존 사무실에 도착했다. 분명 포장이사를 예약해뒀건만 대표가 주말에 들렀는지 짐을 몽땅 싸 두었다. 빈 박스엔 친절하게 내 이름까지 적어놓았다. 또 짐 정리. 이럴 거면 왜 포장이사를 하냐고요. 어쨌든 점심을 간단히 먹고 새로운 사무실로 이동했다.

 

차창으로 스미는 햇살이 나른했다. 몸은 피로하고 정신은 몽롱하고 시트는 소름 돋게 따뜻했다. 가는 동안 나는 곤한 잠에 빠졌다. 거의 다 왔다고 대표가 몇 번인가 툭툭 쳤는데 거의 다 온 게 아니라 정말 다 왔을 땐 이대로 납치라도 당했으면 싶을 만큼 내리기가 싫었다.

포장 기사들은 책상과 책장 자리만 잡고 휑 가버렸다. 냉장고 악취가 진동하는 새 사무실에서 대강 짐을 풀고 컴퓨터 세팅과 인터넷 설치를 마쳤다. 다시 대강 정리하다가 퇴근. 

이전한 사무실에서 이사한 집으로 가는 첫 퇴근길이었다. 나는 길 찾기 앱으로 10분이면 충분하다는 거리를 30분이 넘도록 헤맸다. 30미터 이상의 직진 코스가 거의 없고 골목은 요리조리 꼬였다. 지도를 보면 더 헷갈리기 때문에 이쯤, 이쯤, 감으로 찾다가 저긴가 싶은 게 보여서 다 온 줄을 알았다. 

집에 들어와 조금만 쉴까 했더니 순식간에 자정이 넘었다. 그런 하루였다.


그리고, 문제의 다음 날. 늦잠을 잤지만 출근 준비를 마치고도 20여분 여유가 있었다. 지도대로만 따라간다면 제시간에 도착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어제의 실패로 미루어보건대 모험은 다소 위험할 듯싶었다.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남자 친구의 오토바이 뒤에 올랐다. 당신만 믿는다.

믿었지만, 우리는 같은 구간을 뱅뱅 돌았다. 그러니까 맹세코, 어렵사리 사무실에 도착한 거다. 

그게 뭐. 뭐가.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너가 잘했다는 거냐. 아, 씨발 몰라. 나도 지칠 대로 지쳤다고. 마음의 소리가 이렇게 항변하고 있었다. 뻔뻔하네.


대표 입장에선 괘씸했겠지. 슬슬 시동을 걸어온다. 니가 출근 시간만 못 지키느냐. 

그건 또 아니라서 나는 바로 꼬랑지를 내렸다. 대표가 지방 출장에 간 날, 당연히 사무실에 안 오는 줄 알고 여섯 시에 문을 박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식 퇴근은 일곱 시다.) 밖에서 누군가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대표. 자체 퇴근이 발각된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실은 그 전날엔 오후 3시에 퇴근했다. 버스 시간에 맞추려고 10분씩 일찍 퇴근한 건 뭐 부지기수다. 

이쯤에서 엔진이 멈추었다면, 나는 깨끗하게 승복하고 새 마음 새 다짐으로 새 사무실에 적응했을 거다. 사무실이 대표 집 가까이로 이전했다는 건 이전의 만행들과 안녕을 고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대표는 멈추지 않고 아주 나를 박살 낼 요량으로 달려들었다.

 

너, 사무실 이전하면 9시에 출근하기로 했지. 

그런 적 없다. 이전하기 전에 그런 얘기가 넌지시 오간 적은 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전 9시가 출근인 회사, 애초에 나는 거른다. 그랬더니, 다른 회사를 봐라, 그게 기본이란다. 그런데 이 회사는 연차나 수당 같은 기본이 없다. 그건 이 회사가 작은 출판사이기 때문이라고, 작은 출판사 어디에서 그런 걸 다 챙기는지 나더러 찾아보란다. 뭐야 그게. 개인적 일정이 생기면 사정을 봐준다지만 그때마다 대단히 조아리는 자세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몹시 싫었었다. 그래서 성실히 불성실하게 자체 복지를 마련한 건지도 모르겠다.

오만 생각이 스쳤다. 대표는 내가 꽝 하고 부딪쳐야 정상인데 표지판처럼 멀뚱히 있으니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니 멋대로 앞으로도 열 시에 출근하겠다는 거냐. 

결정을 해야 했다. 출근 시간을 중간에 바꾸려면 직원들 동의를 얻는 절차가 필요하지 않나. 직원이 한 명뿐이라고 대표 임의대로 출근 시간을 바꿔버리나. 그게 기본이라면 나는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뒤늦게 내가 답했다. 기존대로 열 시에 출근하겠습니다. 

대표는 기가 막힌다는 듯 "좋아, 앞으로 사정 봐주는 거 없고 시키는 일은 무조건 다 해." 명령했다. 

지도 편달할 역량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성장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되자고 말하던 이 사람과 오래 일하고 싶다는 초반의 마음가짐은, 강압적인 태도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 사람이 그런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게끔 신뢰는 내가 먼저 깨버렸다는 것을 안다. (본의 아니게 대표와 회사를 험담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려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다시 고민에 빠졌다. 니가 대표 같고 내가 직원 같아, 라고 말하는 대표가 뭔가 안쓰럽기도 하고 조금 귀엽기도 해서 그래 내가 정신 차리고 서둘러 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거의 최저임금으로, 휴가는커녕 사정도 봐주지 않는 회사에 다니며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붙여보았다. 

못한다, 나는 못 해요. 그래요, 나는 기본을 못합니다.


그리하여 현재 백수라고요. 

변명이 너무 길어져버렸나. 변명이란 응당 길어야 제맛이지. 제멋인가. 아무렴 좋을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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