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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Sep 22. 2018

오늘의 고문

어쩌자고 이런 델 왔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리에서 고개를 파묻고 있다. 저마다 무언가 쓰고 있을 테다. 틈바구니에 끼어 나는 홀짝홀짝 맥주나 마시고 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트림을 힘주어 참을 때마다 집 생각이 간절해지고 왜 이런 고문을 자처했나 한숨이 나온다. 그렇다고 숨도 제대로 뱉지 못한다. 방심한 사이에 꺽 소리가 딸려 나올까봐.


어쩌자고 이런 델 또 왔을까.

푸념하듯 첫 문장을 떼고 말았다. 다음 문장은 도저히 이을 수가 없다. 잔을 내려놓고 노트를 덮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글이 지어지는 세계를 등지고 낯설고 먼 장소에 망연하게 서 있다. 잇지 못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비눗방울처럼 터졌다. 흔적도 없이 번번이 그런다. 무작정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소변이 마렵다. 교회에 불이 켜져 있다. 계단을 오른다. 화장실 문이 열려 있다. 요의를 해결한다. 거울을 본다. 뭐하냐, 너.


올해 들어 두 번째 참여하는 글쓰기 모임이었다. 첫 글 모임은 자기소개부터 망할 조짐이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디를 봐야 할지 차례가 다가올수록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데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을 향하는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잔뜩 뜸을 들이는 꼴이라니, 얼마나 거창한 소개를 한다고.

 

거의 반년만에 재도전한 모임은 그런 면에서 부담이 덜했다. 소수 정원에, 합평은 물론 자기소개도 없었다. 한 달 음료비를 미리 지불하고 원하는 음료를 주문한 뒤엔 그저 쓰기만 하면 됐다. 음료도 다양해서 다음 주는 와인이다 젯밥에 우선 눈독을 들였다. 

여기까지가 좋았다. 하나 둘 속속 도착하고 빈자리가 채워지자 사려 깊은 간격이 사라졌다. 말없이 쓰는 시간을 바랐지만 옆 사람 눈치만 살피고 있다. 

아무도 너 쓰는 거 안 훔쳐본다고. 대충 써라 좀. 이번에도 글렀나, 정말 어쩌자고 온 걸까.


적응은 느리고 싫증은 빠르다. 그런 상황에서 한달음에 줄행랑치는 건 내 주특기다. 느린 적응과 빠른 싫증은 훤히 예상한 바였으나 고문 같은 시간을 견뎌서라도 한계를 타파해야 쓰는 습관을 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쓰기 모임 같은 거, 더 이상 사절이라고 혀를 차 놓고 눈에 띄면 지나치지 못한 채 기웃거린 이유다. 

그러다 최근 세 번째 모임에 덜컥 신청해버렸다. 대신 여기서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압박감을 내려놓고 있다. 그러기에 적합한 방식ㅡ글쓰기는 집에서, 합평은 발표자만ㅡ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어 숨 죽여 읽고 듣는 것 말고는 사실 내가 하는 게 없다. 첫 시간, 미리 적어간 짤막한 자기소개서를 더듬거리며 목표는 다음 주 참석입니다, 라고 말했는데 어느덧 4주 차를 넘겼고 이대로라면 남은 2회까지 개근할 기세다. 


단지 세 시간 동안의 착석이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고문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좀이 쑤실 줄은 미처 몰랐다. 이 몸으로 회사는 어떻게 다녔더라, 백수의 생활이란 적응은 빠르고 싫증은 느린 법이다. 이 또한 분명해 보인다. 이번 모임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나면 내게 익숙한 장소에서 편안한 자세로 쓰고 싶다. 성실한 백수답게 속 편한 내 속도대로. 현재로선 이게 가장 분명해 보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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