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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May 12. 2018

오늘의 풍경

내가 속한 이 환경이 마치 풍경 같다

사무실 청소를 대강 했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쇼핑백에 폐지와 고장 난 전기주전자를 담는 정도였을 뿐인데 금세 피곤이 몰려왔다. 3월 내내 세 사람 몫의 이삿짐을 싸고 쌓는 걸 반복하느라 지친 모양이다. 이달은 짐 싸느라 다 가겠군 했는데 정말 그렇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1년 넘게 같이 살았던 ㅇ가 먼저 이사를 했다. 나는 사무실 이전이 확정된 1월 무렵에 그 근방으로 이미 방을 구해놓았으나 ㅇ의 이사가 끝난 후 짐 정리를 하는 게 덜 복잡할 것 같아 맘 편히 미뤄둔 상태로 ㅇ의 이사를 도왔다. ㅇ가 나간 뒤 본격적으로 내 이삿짐 싸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포장이사를 생각했다. 여차하면 포장이사지, 하는 배짱으로 넋 놓고 있었던 것도 같다. 짐 정리를 하다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서 되도록이면 힘을 안 쓰고 싶었다. 그런데 ㅇ를 도우며 가장 귀찮았던 책 묶기에 힘을 써버린 나는 노동은 이쪽에 하고 내 쪽엔 돈을 쓰기가 억울해졌다.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다. 포장이사를 하기엔 내 짐이 적(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싸다 보니 이게 끝이 안 나는 거다. 물론 마구잡이로 집어넣으면 쉽게 끝날지도 모른다. 그게 안 되니 속도가 안 나는 거지만. 

책을 묶고 쌓을 땐 반듯하게 각을 잡아서, 음반은 가나다 별, 알파벳 순서로, 잡동사니는 용도별로 테트리스하듯 차곡차곡, 이건 쓰임이 있을 테니 아직 넣지 말고 저건 깨지니까, 이 가방은 입주 청소하는 날 챙겨갈 거, 저 가방은 이사하는 날 메고 갈 거,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그 와중에 세월아 네월아 읽고 있다. 예전에 받은 엽서며 옛날에 쓴 다이어리며 완충재로 쓸 신문이며 그런 것들을. ㅇ 짐을 쌀 때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경고하던 짓을 내가 똑같이 하고 있다. 느릴 수밖에. 

날짜는 임박해오고 마음만 조급해지는 상황에 남자 친구의 짐까지 합쳐졌다.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 친구와 둘이서 옮겨놓았는데 말 그대로 정말 옮겨만 놓았다!


여기까지 써놓고 저장해둔 사이에 벚꽃이 다 졌다. 3월은 짐을 싸느라 갔다면 4월은 푸느라 가버렸다. 막판에 되는 대로 쑤셔 넣은 짐들이 뭐가 뭔지 몰라 뒤지고 뒤엎고를 반복하는 동안은 아수라장의 연속이었다. 겨우 박스를 비워 버리면 새로운 택배가 오고, 널브러진 박스는 순식간에 쓰레기로 가득 차고. 먹고 치우고 씻는 과정만으로 밤이 금세 깊어지는데 중간중간 산책도 해야 했다. 날이 좋고 벚꽃이 한창이었으니까.

옷 정리를 마치고 필요한 자리에 가구가 세팅되고부터 조금씩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집이 어수선할 땐 도무지 마음의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지금은 80%쯤 안정을 찾았다. 아직 집안 곳곳 돌볼 곳이 남아 있지만 느긋하게 해도 될 일이다. 

사무실도 무사히 이전했다. 아침에 걸어가며 꼬인 이어폰 줄을 풀다 보면 어느새 사무실 앞이다. 그 정도로 가깝다.

 

이사를 하고 내게 생긴 변화는 당연하게도 환경이다. 

이사한 집은 산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산 밑으로 적당한 높이의 담이 골목을 따라 쭉 둘러져 있고 양 끝에는 고등학교가, 나머지는 전부 가정집이다. 우리 집은 제일 끝 코너에 있어서 학교 운동장과 마주 본다. 아랫동네에서 윗동네로 굽이굽이 가장 높은 곳에 다다라야 도착하는 변두리 중의 변두리. 여기까지 들어오는 마을버스가 없어서 지하철이든 버스든 어딘가로 나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마트나 식당은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곳에 밀집되어 있다. 슈퍼는커녕 가까운 편의점조차 거리가 꽤 된다. 

겨울에 집을 보러 왔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다. (그땐 편의점도 없었다.) 이제 혼자 살아야 하는 내게 처음 맞닥뜨리는 낯선 동네의 어둠은 두려움이었다. 공간이 마음에 들고 낮이 기대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돌려봐도 이만한 집을 찾기란 어려웠다. 아래쪽으로 아주 조금 내려갔을 뿐인데 월세는 비싸지고 공간은 볼품없어졌다. 다닥다닥 건물이 붙어있는 다세대주택에서 뷰 같은 건 사치였다. 창을 열었을 때 맞은편 창이 아닌 낡은 외벽이 보인다면 차라리 다행일 지경이었다. 밤길이 걱정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턴 이 집 생각만 간절했기 때문에 계약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절망했다. 망설일 땐 언제고 쉽사리 포기가 되지 않았다. 다시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계약이 파기된 건지, 뭐가 어긋났던 건지, 내게 기회가 왔다. 그 길로 부동산에 내려가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ㅇ는 집이란 타이밍과 운명이라고 자주 말했었는데, 나의 염원이 이 집과 닿았다고 생각한다.


나란한 방 두 칸에 거실 겸 부엌이 있고 조그만 베란다가 앞뒤로 딸린 집. 고양이 두 마리와 나, 세 식구가 살기에 실로 알찬 구조다. 기존 세입자가 워낙 깔끔하게 공간을 가꿔놓아서 배치를 계획하기도 수월했다. 무엇보다 거실의 뷰가 훌륭하다. 테이블을 거실(?) 중앙에 두고 벽 쪽에 등을 대고 앉으면 등산로 진입로가, 반대쪽에 앉으면 교정이 보인다. 

뷰만 믿고 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초록이 짙어질수록 그 말의 깊이가 실감 난다. 요즘은 바람이 불면 산내음과 함께 집 안으로 꽃향기가 스민다. 오르막길의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미묘하게 산 공기로 바뀌는 것도 신기하다. 겨울은 몹시 추울 테지만 여름은 얼마나 푸르를지. 

소리도 빼놓을 수 없다. 새소리, 빗소리, 나뭇잎 바람에 스치는 소리, 학교 종소리, 학생들 뛰어다니는 소리, 테니스장에서 공치는 소리...

안과 밖 그리고 낮과 밤. 내가 속한 이 환경이 마치 풍경 같다. 나는 이 집이 좋다. 2년 후가 벌써 걱정될 만큼.


또 다른 환경의 변화는 동거인이 된 남자 친구인데... 이 풍경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차차 쓰기로 하자. 슬슬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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