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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Oct 28. 2018

취향이 다른 사람

짙어만 갑니까, 짙어만 갑니다

이아립 싱글이 나왔다. <망명> 발매 이후로 꽤 오랜만의 음원이라 달력에 표시까지 해놓고 기다린 희소식이었다. 일주일 내내 연속 재생을 걸어두고 온종일 듣고 있다.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짙은 목소리, 잔잔한 선율이 집안을 맴도는 동안 공기는 한층 느슨해진다. 나는 커피를 내리다가, 창밖을 내다보다가, 담요 위에 내려앉은 볕 한 줌과 그 곁에 웅크린 고양이를 보다가 문득 벅찬 감정에 손바닥이 찌르르해지면 주먹을 꽉 쥐어본다. 아끼는 음악을 들을 때 내가 느끼는 행복은 완벽한 원형에 가까울 것이다. 아마 첫눈이 올 때까진 지겹도록 듣지 않을까.

 

이아립 음악은 밴드 스웨터 시절부터 한결같이 이어진 나의 굳건한 취향 중 하나다. 나랑 1년 이상 사귀었던 남자들은 한 번씩은 꼭 이아립 공연에 같이 갔었다. 싫다는 걸 억지로 데려간 게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내 취향에 호기심을 갖고 곧잘 따라나섰다. 책이나 영화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호들갑스럽게 관심을 쏟는 식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내 쪽으로 스며들었다.

그런데 현재의 남자 친구는 글쎄. 흥미가 없으면 척이라도 해야 할 판인 연애 초반에도 이쪽으로 이끌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지. 지난 연애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의아함이, 한 달이 훌쩍 넘은 시점 불쑥 나를 찾아왔다. 그게 불만이라기보단 뭐랄까, 조금 불안했다. 궁금하지 않다는 건 관심이 없다는 거잖아, 관심이 없다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나는 혼자 이 연애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있었다. 매우, 심각하게.

 

그즈음 서울혁신파크에서 레코드페어가 열렸다. 빠듯한 살림에 재테크라는 명분을 앞세워 갖고 싶던 한정반 엘피를 잔뜩 산 나는 남자 친구한테 '이것 좀 보세요' 하듯 자랑하는 문자를 보냈다. 잘했다는 답장은 받았지만 그게 다였다. 내가 뭘 하든 잘했다고 말하는 남자 친구의 입버릇은 이미 파악한 후였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떤 걸 샀냐고, 무슨 음악이냐고 물어봐줬다면 미주알고주알 떠들었을 텐데, 이 남자는 '재밌게 놀아요'라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대화의 물꼬를 차단했다. 나는 시무룩 김이 빠져서 다른 부스를 구경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친구는 늦잠을 자버리고, 정오의 태양은 목덜미를 동그랗게 달구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 담배나 피우며 ㅇ를 기다렸다.


ㅇ는 따끈따끈할 나의 연애를 궁금해했다. 나는 우물쭈물 머뭇거리다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와 비슷한 결의 취향과 감성을 지닌 그녀는 내가 고민하는 바를 단번에 이해했다. 하지만 홀로 깊게 곱씹어야 할 문제를 괜히 수면 위로 드러냈나 싶어 이내 스스로가 못마땅해졌다. 급기야 나는 ㅇ에게 예정된 소개팅을 파투 내달라고 간신배 같은 부탁을 하고 말았다. 그렇다, ㅇ는 남자 친구의 친구와 소개팅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정확한 날짜나 장소를 잡은 건 아니었지만 당사자 두 명이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기에 첫 단추는 꿰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 친구는 내가 뭘 샀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으나 ㅇ의 시간이 언제 나는지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친구 핑계를 대며, 소개팅은 좀 어렵겠다고. 그는 '그렇구만' 하고 평소처럼 대꾸했을 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모두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먼저였다. 내 마음도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 만남까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 성인남녀가 만나는 일에 굳이 관여할 일이 뭐 있겠는가, 알아서들 만나는 거고 또 만나면 잘된 거지.

그냥 내가 우리 연애에 확신이 안 섰다. 어쩌면 흐지부지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후의 난감한 일들이 꼬리 물듯 딸려왔다. 피곤하게 엮이는 건 질색이었다.


속앓이에 양심의 가책까지 얹어졌다. 남자 친구는 왜 내 기분이 처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캐묻지 않고 내가 조용히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발 물러났다. 의도한 배려는 아니었을 것이다. 곧이곧대로 믿고 곧이곧대로 행동하는 그의 단순함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대처 덕분에 오롯이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취향에 관한 생각을 단계별로 정돈해보았다.


연애 전.

1. 단서 - 음반매장 운영

    나 : 음악 취향 엄청나겠지?

    그 : 돈벌이

2. 단서 - 남자 친구 카카오톡 프로필에 깔린 콜드플레이의 노래

    나 : 콜드플레이는 1집이 진리지

    그 : 초창기 때의 콜드플레이 잘 모름

3. 단서 - 역시, 남자 친구 카카오톡 프로필에 보이는 여행 사진들

    나 : 오 여행

    그 : 제가 하노이에서 죽을 뻔한 적이 있는데요...

4. 단서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 개봉

    나 : 그게 뭐지

    그 : 마블 영화 몰라요?

5. 단서 - 취미

    나 : 손님 없을 때 책 봐도 돼요? (안 돼요)

    그 : 손님 없으니까 게임해야지 (난 사장)


연애 후.

1. 단서 - 음악 많이 들음

    나 : 내가 듣는 음악, 남자 친구가 안 들음

    그 : 남자 친구가 듣는 음악, 내가 안 들음

2. 단서 - 여행 좋아함

    나 : 머무는 여행 위주. 숙소 선택에 심혈을 기울임

    그 : 빡 센 여행 위주. 숙소에선 잠만 잠

3. 단서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 관람

    나 : 그루트 귀엽네

    그 : 오진다! (마블이 블라블라...)

4. 단서 - 책에 관한 입장

    나 : 종이책, 소설 또는 에세이 종류

    그 : 전자책, 무협 또는 판타지 종류

5. 단서 - 게임에 관한 입장

    나 : 생각 없음

    그 : 게임의 세계란 말이야...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생각이 정리될수록 또렷해졌다. 각자의 취향은 다를 수밖에 없고 관심이 생기지 않는 분야는 궁금하지 않은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나는 취향이 겹치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혼자 즐기기에 충분한 것들이고, 함께 좋아해 줄 친구들은 늘 가까이 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은 관심이 없어서 모르는 게 대다수인데, 취향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혼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연인으로 인해 확장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강요에 의한 것은 없다. 제아무리 그럴듯한 것일지라도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한다는 거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는 내가 남자 친구에게 먼저 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게임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나도 한 번 해볼까? 싶은 마음조차 일지 않는다. 이 음악이 좋다고 이 영화가 재밌겠다고 그가 내게 링크를 보내와도, 내 취향과 거리가 멀면 아무런 동요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는 이 남자가 싫은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혹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엔 관심을 갖길 바라면서 그의 취향은 은연중에 무시한 게 아닐까. 취향에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큰 범주 안에서 따지고 보면 우리는 좋아하는 게 닮아 있다.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고 여행과 책을 좋아한다. 지금은 게임 자체가 사라졌지만 한때 나는 '퀴즈퀴즈'라는 게임의 노예이기도 했다. 그와 내가 손을 뻗는 세부적인 잔가지가 다를 뿐이었다. 물론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달리 뻗은 가지긴 하지만 멋대로 뻗다가 닿는 타이밍이 반드시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맘 졸이며 본 <너의 이름은>이 그 특별한 시작이었고, <런닝맨>을 보며 박장대소한다. 프란츠 퍼디난드의 'Take me out'을 들으면 동시에 어깨춤을 들썩인다. 그렇게 맞닿는 교차점들은 의외로 자주 발견된다. 게다가 남자 친구는 어쩌다 코인 노래방에 가면 그가 평소 듣는 노래가 아닌, 내가 좋아할 만한 곡을 부른다. 그럼 난 또 반하고 만다. 그깟 취향 때문에 확신이 어쩌고 저쩌고, 헤어지니 마니를 생각했다니, 나는 당장 남자 친구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이실직고 후 혼자만의 취향 사태가 일단락되고...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것을 하며, 때로는 함께 좋아할 만한 것을 찾으며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났을까, 멍하니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남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매장에서 한창 일할 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전화가 반가워서 나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남자 친구의 목소리는 어쩐지 다급했다.

그거 뭐지? 자기가 듣던 노래, 부른 사람.

어떤 거?

그거 내가 이상하다고 한 노래 있잖아.

아하, 이랑!

어어, 알겠어, 하고 통화는 금방 끝났다.

오호라, 관심이 생겼단 말이지? 매장에서 틀려나? 나는 전화를 끊고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잠시 후 남자 친구에게 '좋지 그치. 자꾸 생각나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돌아온 답장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인디가수인 매장 직원이 음악 문제로 우울해해서 위로랍시고 이랑 노래를 들려줬다는 거다. '이런 거지 같은 노래도 인기 많대요, 그러니까 용기 내요'라는 취지로.


이건 정말 화를 넘어 크나큰 실망이었다. 내 취향을 그 따위로 써먹냐. 뒤늦게 사태 파악이 된 남자 친구가 사과하기 시작했지만 때는 늦었다.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이 거지 같은 노래로 둔갑된 것도 모자라 타인에게 건넨 위로의 수단으로 폄하되었다. 극단적으로 풀이하자면, '제 여자 친구는 이렇게 거지 같은 음악을 좋아한답니다'라고 나의 가치까지 우습게 여겨진 느낌이었다. 나는 웃자고 하는 소리로, 어디 가서 자기 와이프나 여자 친구 흉보는 남자들을 제일 한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순간적으론 분위기에 취해 웃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스워지는 건 흉을 본 사람이다. 자기 곁의 소중한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결국은 가장 우스워지는 거다.

남자 친구는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속상한 마음이 밤까지 지속되어 맥주를 마시고 잠들었지만 미안해하는 남자 친구의 귀여운 얼굴을 보고 나니 뭐 조금 괜찮아졌다. 얼굴이 다 했지 뭐, 다시는 그러지 마라.

 

우리의 연애는 어느덧 1년 반이 다 되어가고 나는 이제 남자 친구를 영감이라 부른다. 한 집에 산 지도 반년이 넘었다. 그리고 이틀 전 우리는 종이 한 장에 나란히 싸인을 한 것으로 부부가 됐다. 문화적 취향뿐 아니라 식취향도, 생활습관도, 그 밖의 많은 것이 여전히 다른 점 투성이지만 내 마음은, 이 사랑은 조금씩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몇 날 며칠 '짙어만 갑니다'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는데, 물 마시러 나온 영감이 자기도 모르게 이아립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세뇌당한 것이다. 그래서, '짙어만 갑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네, 그런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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