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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Mar 05. 2018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라고

화장한 얼굴을 보이는 게 더 부끄럽다

몇 년 사이 피부톤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입술색도 많이 죽었다. 아직까지 잡티나 주름은 없는 편이지만 모공과 블랙헤드는 거울을 볼 때마다 거슬리는 부분이다. 최근 들어서는 다크서클과 피부 탄력이 신경 쓰인다. 안 그래도 칙칙한 안색에 탄력까지 없으니 인상 자체가 뭐랄까, 마치 우환이라도 있는 사람인 양 영 생기가 없다고 해야 할까.

피부 탄력은 나이가 들어가며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것이라 쳐도 전체적으로 탁한 얼굴빛은 반박할 수 없는 관리 소홀이다. 피부는 모름지기 공을 들이는 만큼 좋아지는 것이라는데 나는 타고난 피부도 아니면서 그쪽으로는 통 관심이 없었다.


딱 한 번, 엄청난 노력을 했던 때가 있긴 하다. 스무 살 무렵 사춘기 때도 없던 화농성 여드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이라 처음에는 손쓸 방도를 몰랐다. 여드름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를 받으니 여드름이 또 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내 스무 살이 그리 유쾌하게 기억되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여드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양배추를 갈아 마시고 곡물가루로 세안을 하고 천연화장품을 사용하고 각종 연고를 바르고 피부과와 관리실을 드나드는 등 나름대로는 별의별 짓을 다 해보았다. 그런데도 도무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화장으로 가리는 게 급선무였다. 사실 말이 좋아 화장이지 로션을 바른 후 파우더로 팡팡 두드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달걀귀신처럼 허연 얼굴만 허공에 둥둥 뜬 형상이 예쁠 리 없는 건 당연했다. 가린다고 가려질 여드름도 아니었고.


말썽이던 여드름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말끔히 사라졌다. 놔두면 저절로 사라진다는 엄마 말이 정답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기미로 몇 년이나 마음고생을 했다. 옛날 사진을 보면 화장기 없이 순박하고 말갛던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화장으로 둔갑되는 시기가 있다. 아마도 그즈음이 엄마가 당신의 맨얼굴을 부끄럽다고 느낀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의 본격적인 화장 역시 기미를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드름으로 인한 나의 우울감이 극에 달할 때쯤, 엄마의 기미가 감쪽 같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포기하고 방치했더니 사라졌더라는 거다. 하지만 나는 기미와 여드름은 격투기로 치자면 체급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기미는 화장이 짙어지는 만큼 가려지지만 여드름은 화장이 짙어질수록 부각된다. 기미는 체급에서부터 미달인 것이다.

엄마의 위로는 당시의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으나 방치의 결과는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방치의 목적이다. 엄마는 포기하고 방치한 반면 나는 귀찮아서 방치했다. 

목적이 뭐든 이쯤 되니 피부는 공을 들이기보다 방치해야 옳다는 결론인 것 같기도 하다.


예뻐지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었다. 그러나 여드름도 사라진 마당에 무슨 화장이야 싶었다. 

화장은 기술과 정교함을 요한다. 공부가 필요하다. 벌써 귀찮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옷이나 가방을 사는 건 어찌나 신나고 간편한지.

슬슬 다시 화장의 필요성을 느낀 건 스물세 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이번엔 모공과 블랙헤드를 가리려고 한 옅은 수준의 화장이었는데 붉은색 틴트까지 바르고 나면 어라, 그럴싸했다. 어라, 그럴싸하니까 계속했다.

파우더 팡팡에 입술 포인트, 이 정도의 화장을 지속하며 무슨 화장품을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늘 여기저기서 얻은 것이었지 내 돈으로 파우치를 채워본 적이 없는 거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는 파우치 속에 있어 보이는 것 한 가지는 가지고 다니자고 결심했다. 이유 또한 엉뚱한 게,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였다.

어림잡아 십 년만에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 다 같이 잠든 다음 날이었다. 친구들은 세수를 한 뒤 하나둘씩 파우치를 꺼냈다. 내 눈에는 그 파우치가 성공한 여성의 표상처럼 보였다. 파우치 안에서 바비 브라운, 샤넬, 맥 같은 화장품이 쉴 새 없이 나왔고 그런 화장품을 생전 처음 본 나는 로션을 바르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브랜드의 로고를 외웠다.

하지만 직장인인 친구들과 달리 나는 대학생이었고 그만한 화장품을 살 돈이 없었다. 그때의 마음을 고이 담아두었다가 스물여덟 살에 실현한 거다. 피부톤 보정이 전부라 이것저것 고를 것도 없이 한 가지면 됐다.

내가 번 돈으로 처음 산 화장품은 슈에무라의 파우더 팩트. 그 뒤로 베네피트를 거쳐 디올에 정착했다. 기초 화장품에도 손을 뻗었다. 그러나 거금을 들여 바꾼 기초 화장품이 생계까지 압박하는 지경에 이르러, 화장대를 열 때마다 와, 있어 보인다! 혼자 감탄하는 짓은 깨끗하게 관두기로 했다. 이 돈이면 책이 몇 권, 이 돈이면 음반이 몇 장, 하는 식으로 계산기가 정상 작동되자 허세로서의 소유욕은 금세 시들었다.


그 뒤로는 청빈낙도의 자세로 아니, '모든 게 부질없지 아니한가'의 자세로 돌아가 저렴한 화장품으로 대체하고 쓰다 남은 파우더를 부셔 썼다. 보기가 딱했는지 ㅇ가 본인 피부에 안 맞는다며 파우더 팩트를 줬는데 그걸 리필만 교체하면서 몇 년째 쓰고 있다. 얻은 것이긴 하지만 에스티 로더라서(?), 파우치 속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ㅇ로부터 립스틱이라도 좋은 것 쓰라는 잔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생각해보면 대학 무렵부터 발랐던 싸구려 틴트가 입술색을 서서히 죽게 만든 것 같다. 굴러다니는 립스틱만 바르다 보니 각질이 심해져 물 한 잔만 마셔도 바르나 마나 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 백화점에서 테스트를 해보고 입생 로랑 립스틱을 샀다. 확실히 발림성이나 지속력이 기존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색감도 내 피부에 잘 맞아 립스틱을 바르면 얼굴 전체가 살아난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파우치 속 자존심 따위가 아니라 인생 립스틱이 된 셈이다.


그래 봤자 화장 직후 얼마간 표시가 날 뿐 시간이 흐르면 맨얼굴과 거의 비슷한 상태가 된다. 미묘한 차이지만 아예 맨얼굴보다는 조금 낫고 막 화장한 얼굴보다는 조금 자연스러워지는 거다. 화장을 무척 잘하는 (또 다른) ㅇ의 말에 의하면 그게 바로 화장이 무너지는 순간이란다. ㅇ는 화장은 무너지는 순간이 가장 예쁘다는 말도 덧붙였다. 말인즉슨 내가 밤에 남자 친구와 만났을 땐 낮에 한 화장이 다 무너지고 난 뒤라는 얘기다. 

남자 친구는 그런 내 얼굴을 민낯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자기는 화장 안 해서 좋아, 라는 망발을 하는 게 아닌가. (칭찬이야 욕이야.) 처음에는 웃어넘겼지만 다시 그 소릴 들었을 땐 왠지 발끈해서 "나도 다 해."라고 받아쳤다.

어디?

응...? 다...

비록 뭔가 진 것처럼 대화가 끝나고 말았지만.


하루는 오후에 두어 시간 짬이 난 남자 친구가 밥을 먹자고 나를 합정으로 불렀다. 우리가 집 근처가 아닌 바깥에서 따로, 그것도 낮에 만나는 건 아마 처음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한여름이었다. 

집에서 미적거리던 나는 잽싸게 준비를 하고 나가 현관문 밖에 달린 거울을 봤다. 노란 조명뿐인 우리 집 거울로는 보이지 않았던 화장의 엉성함이 한낮의 태양 아래 여실히 드러났다.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차라리 빨리 화장이 무너져 내리길 바라며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손거울로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무너지기는커녕 무더위에 긴장감까지 더해져 점점 못생겨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 친구를 만나자마자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멋쩍어진 나는 쳐다보지 말라고 괜히 큰소리를 치고 활짝 웃어버렸다. 바로 그때다. 

자기, 잠깐만. 이빨에 립스틱.

순간 얼음. 겨드랑이까지 축축해지고 말았다. 화장한 얼굴을 보이는 게 이렇게 부끄러울 줄이야. 횡단보도 신호는 왜 또 이렇게 안 떨어지는지.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려 노력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온통 '아 망했구나.' 하는 소리가 맴돌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민망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애꿎은 카메라 셔터만 눌렀다. 그 안에 다 먹고 남은 라멘 국물이 담겼다.

흔들린 사진이 반딧불이처럼 아름다웠다. 이렇게 보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흐릿하고 희미하고 여운이 남는 분위기 미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남자는 왜 쓸데없이 시력이 좋아서.

헤어지는 길, 남자 친구는 매장으로 복귀하러 603번을, 나는 602번 버스를 탔다. 603번을 따라 타도 두어 정거장 걸어가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을 자신이 없어 나는 굳이 다른 노선을 선택한 거다.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니 딱 두 시간이 흘러 있었다. 곧바로 거울을 들여다봤다. 화장이 무너졌다.

나는 립스틱을 한 번 덧발랐다.

아, 이 얼굴을 봤어야 해. 이 사람아, 이거 내 인생 립스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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