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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Oct 24. 2017

걸어서 5분 거리

공백을 메우고 여백을 두는 공간처럼

아침저녁으로 남자 친구는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왕복 세 시간의 출퇴근길을 반복한다. 그것만 해도 진이 빠지는 일인데 꼬박 열두 시간을 서서 근무한다. 백화점 안에 속한 매장이라 모자나 샌들 같은 편한 차림새는 금지. 수시로 순찰을 도는 보안요원의 눈치를 봐야 하고 주전부리 하나 맘 놓고 먹지 못한다. 끼니당 2900원 하는 직원식당 밥은 맛도 모양새도 형편없어 배고프단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빵조각 같은 걸 재빨리 입에 넣고 뒤돌아 오물거리는 모습이 아무 사이 아닐 땐 짠해도 귀여웠는데 연인이 되고 나니 왜 이렇게 딱하고 가여운지.


오래전 젊은 부부의 일상을 실험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지 육아에 지친 상황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남편에 대한 불만이 폭주한 상태였다. 그런 아내에게 남편의 하루가 영상으로 전달된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는 모습, 일터에 도착해 숨 돌릴 새 없이 일하는 모습,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야 겨우 짬을 내 혼자서 조촐한 식사를 하는 모습 등이 시간 순서대로 쭉 이어진다. 아내는 영상이 채 끝나기도 전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된 눈물. 고된 노동현장을 엿보는 일이 아내로선 눈물겨웠을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그만 울어버렸다. 내 남편도 아닌데.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다. 그가 하는 일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기엔 우리가 보낸 한 달여는 너무 짧다. 단지 마음이 쓰이는 거다. 노동의 강도가 견딜 만하든 그렇지 않든 손님을 상대하고 몸을 움직이고 먹는 데 눈치를 봐야 한다는 삼중고를 옆에서 들여다본 나는 안 봐도 뻔한 이 사람의 매일이 벌써 눈물겨웠다.

지나친 감정이입인지도 모른다. 건장한 청년이 묵묵히 제 몫을 하는 것일 뿐 남자 친구는 불평을 쏟아낸 적도 없고 풀이 죽지도 않았다. 의외로 소소한 사건들에 웃음이 터지고 한가할 땐 게임을 하기도 한다. 틈틈이 휴식을 취할 직원 휴게실도 있다. 새로 뽑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업무에 능숙해지고 매장도 차츰 자리를 잡으면 휴일도 늘리고 여행도 가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쓰러운 건 왜일까.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이동, 일단은 이동이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내가 남자 친구를 보러 간다. 

저녁 9시쯤 집에서 나와 설렁설렁 매장 쪽으로 걸어가면 넉넉히 9시 반. 나머지 30분은 꽉 찬 쓰레기통을 비우거나 서점의 잡지 코너를 기웃거리거나 내 맘대로 선곡을 바꾸거나 남자 친구가 마감하는 걸 지켜본다. 정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오면 10시 10분. 문 연 식당을 찾다가 어영부영 시간을 낭비하고 분식이나 중식으로 허겁지겁 허기를 때운다. (하루에 한 끼면 그럭저럭 괜찮은 나와 하루에 네다섯 끼를 먹고도 부족한 남자 친구의 허기짐은 그즈음 정점을 찍는다.) 식사를 끝내고 왔던 길을 되돌아 지하철역에 당도할 즈음이면 어느새 막차시간, 포갠 손을 스르륵 풀어야 할 때다.


하루는 세면도구를 챙겨 왔다는 남자 친구와 찬 공기를 맞으며 줄곧 걸었다. 내가 이 길을 따라 밤마다 당신을 만나러 간다고, 혼자 걷던 길을 둘이 걸었다. 남자 친구는 나를 집 앞에 바래다주고 목욕탕에 노곤한 몸을 녹이러 갔다. 그런 날들이 이틀 걸러 하루로 이어졌다. 근처에 살면 좋을 텐데. 매번 목욕탕에서 재우고 쏙 들어가는 것도 왠지 못할 짓이라 내가 나서서 방을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동네 부동산에 들러 우리 집과 지척이면서 가구를 놓기에 적당한 방을 몇 군데 보러 다녔다. 방의 구도를 보고 공간의 미학을 상상하는 나는 낡고 오래된 집이어도 변신 가능성이 있는 집을 선호한다. 직접 벽지와 장판을 고른 후 반질반질 쓸고 닦고 매만지는 것부터 자잘한 사물의 배치를 고려하는 것까지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수고스러운 과정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집이란 정성을 들일 만한 가치가 분명한 공간이다. 좋아하는 것들로 차곡차곡 공백을 메우고 때로는 여백을 두는, 온전하고 고유한 '내 방'이 주는 위로를 잘 알기 때문에 친구와 함께 살기로 했을 때도 각자의 영역은 반드시 존중하자고 했었다.


남자 친구 역시 자기만의 방에 온기를 심을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혼자 살고 싶은 내 바람을 남자 친구의 공간으로 대리 만족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남자 친구한테 사진으로 보여준 방들은 죄다 퇴짜를 맞았다. 기본적으로 공간을 대하는 개념이 나와 다른 그는 1년만 산다는 전제 하에 풀옵션에 싼 월세방을 원했다. 한 마디로 몸만 들어갔다 몸만 나올 수 있는 그런 방. 풀옵션에 저렴하기만 하면 반지하여도 상관없다는 남자 친구에게 차라리 옥탑이 낫지 않냐고 넌지시 떠봤으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내가 미리 본 방들을 같이 둘러보며 순전히 내 식으로 해석한 이 방들의 장점을, 이를테면 창밖으로 울창한 나무가 보인다, 화장실에 딱 변기만 있어서 오롯이 용변에만 집중할 수 있다, 베란다에서 씻어야 하지만 사계절 해수욕장에 놀러 온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등을 설파해봤지만 대실패. 결국 남자 친구는 어플에서 본, 반지하에, 풀옵션에, 부엌과 방이 분리되지 않아 현관을 열면 세간살이가 한눈에 보이는 좁은 원룸을, 다시 말해 나라면 절대 거들떠도 안 봤을 방을 일사천리로 계약했다.  


물론 선택권은 남자 친구에게 있다. 월세를 내는 사람도 샴푸나 휴지를 사는 사람도 빨래를 널고 잠을 잘 사람도 내가 아닌 그다. 하지만 이사 당일, 방 안에 널브러진 꽃무늬 이불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는 건가. 앞으로 더 알게 될 다름의 무궁무진함이 사뭇 기대되는 바다. (정말?)

어찌 됐든 우리 사이 걸어서 5분 거리.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한 동네에 살게 되었다. 긴긴 출퇴근길이 대폭 단축되었고 갈 곳 잃은 사람들처럼 새벽 거리를 배회하지 않아도 된다. 밥상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다소 궁상맞더라도 맨바닥을 식탁 삼아 마주 앉아야 하겠지만 도란도란 따뜻한 밥을 지어먹을 수도 있게 됐다. 그걸로 위안을 삼자. 이불이야 바꾸면 되지.


어쩌면 남자 친구의 자취방은 서서히 내 취향이 반영된 공간으로 변할지도 모르겠다. 공백을 메우고 때로는 여백을 두는 공간처럼, 우리의 관계도 그랬으면 좋겠다. 너무 휑하지도 너무 빼곡하지도 않게, 완벽하진 않지만 온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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