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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Oct 09. 2018

휴머니즘, 당신

#1

희망도서가 입수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도서관에 대출하러 갔다. 아직 책장에 진열도 하지 않았고 스티커도 붙이지 않은 새 책, 분명 나를 위한 책이었다. 도서근로소녀는 그제야 스티커를 부착하고는 내게 건네주었다. 비밀처럼 가방 속에 책을 숨겨두고 기숙사로 돌아와 방 정리부터 했다. 집에서 보내온, 이틀째 뜯지 않은 택배를 뜯어 박스를 정리하고, 책상 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책들은 제자리에 꽂아두고, 며칠째 의자에 걸린 옷가지들을 옷장 안에 걸어두고, 이것저것 사소한 것들을 치우고는 마지막으로 책을 읽게 될 장소인 침대를 정리했다(단 한 칸의 방이라도 각각의 역할로서 세분화되는 것이다).

  

종종 나는 무엇을 하기에 앞서 어떤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방을 치운다. 내게 있어 '정돈된 방'은 집중력을 가질 수 있는 구도이자 몰아의 경지로 이끄는 발판이 된다. 또 그것은 내가 연을 맺고자 하는 책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기숙사에 돌아와 방 정리부터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단연 숨겨둔 책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첫 장을 열고 몇 줄을 읽자마자 나는 거칠게 책을 덮었고 방 정리를 시작했다. 반드시 예우가 필요한 책이었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방 정리를 했던 것이다. 먼지라도 들어갈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사각의 종이 다발을 바라보며 나는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고, 결론적으로 집중력을 가질 수 있는 구도가 완성되었다.


첫 장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나는 책의 모서리를 접을까 말까 고민하다 수첩에 옮겨 적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음 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활자는 끊임없이 내게 악수를 청하고 수첩은 더 이상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가 버렸다. 나는 반납해야 할 도서라는 사실을 잊은 채(반납할 도서건 말건!) 귀퉁이를 전부 접어 팔각형을 만들고 시퍼런 줄을 벅벅 그어대고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다 여백에 편지까지 써버렸다.

전북 전주, 전태일 문학상, 패배는 나의 힘. 이 세 가지 단서만으로 당신은 나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며 몇 번이나 눈물이 흐릅니다. 삼키지 말지어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것이므로 내 눈에 분수의 기능이 없는 이상 눈물도 흐르게 두자. 마음으로 읽기에 눈물이 참 곱습니다, 하느님, 이토록 감수성이 풍부한 저를 칭찬해주시고 나를 울린 그분은 벌하지 마시고 금일봉 수여하소서. 마누라 도망가고 자식들 학원비에 형편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나는 자주 이런 식으로 낯선 남자에게 마음을 몽땅 빼앗기는 편이에요. 그러니 휴, 당신이 대머리에, 미남자가 아닌 것이 어찌나 제게 다행인지요, 사진을 싣는 경솔한 친절로 절대적이었을 법한 당신에 대한 애정을 단념할 수 있게 해주신 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입니다, 아시죠?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사랑합니다 규관 씨, 세상은 둥글어요, 등등. 하하, 드디어 내가 미쳤군.


훌쩍 마지막 장이다. 납작했던 것이 이스트 빵처럼 거대하게 부푼 것을 보니 책도 빵처럼 같은 공식이 성립한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부풀수록 맛있는 빵인 것처럼 책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책이 맛있게 부풀었다. <패배는 나의 힘>은 잘된 요리다.

자, 시식은 끝났다. 이제 나는 책에 대한 예우를 철회하고 방을 다시 난장판으로 만들 것이며 반납할 도서를 새로 주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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