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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Oct 09. 2018

그루언 전이

#2

갖고 싶은 물건이 많아진다는 건 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다. 이사 후 라면박스 몇 개를 가구 비슷한 것들로 대체하며 하나씩 내다 버렸지만 끝까지 버티는 상자 하나가 있었다. 처치곤란. 그 속엔 책상 서랍에 들어있던 잡동사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박스에 담긴 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밤마다 고민했다. 오래전부터 이케아에서 바퀴 달린 6단 서랍장을 사고 싶었으나 잘난 환율 덕에 도무지 내 주머니에선 살 수 없는 가격의 경지에 이르렀고 입맛만 다시길 몇 차례, 꼭 살 거야, 반드시 살 거야, 벼르고만 있었다. 오늘도 저놈의 신라면 박스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서랍장 가격이 좀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서랍장은 가격이 더 오른 듯했다. 그대로일 수도 있지만 더 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철제 선반을 발견했기 때문에. 철제 선반 가격이 생각보다 싼 걸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휴대폰결제로 사버렸다!

  

다시 시작된, '빗나간 위시리스트'.

말 그대로 위시리스트가 충동적으로 빗나간 것을 말한다. 살면서 수없이 되풀이된 소비습관이기도 하다. 예컨대 A를 사러 마트에 가면 A를 만지작거리다 옆에 있는 B를 계산하고, C를 빌리러 도서관에 가면 C 옆에 다른 책들을 펼쳐보다 Z를 빌린다. 심지어 사람에게까지 적용, H가 마음에 들어 만나러 나가면 별안간 따라 나온 G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현상이다. 나는 이 흥미로운 현상을 자주 의식하고 있었고 '빗나간 위시리스트'라는 이론을 세웠다. 사람을 적용한 소설을 써볼까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다 지지난 번 학기였나, 교양 수업에서 '그루언 전이'라는 낯선 용어를 접하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규정한 이론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나 천재인가, 순간적으로 기쁘다가, 뭐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였잖아, 언짢아졌다.

내가 생각하는 건 남들도 생각한다. 누가 먼저 공개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여 오늘부터 무작정 쓰기로 결심했다.


창조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실제로 오늘, 창조가 죽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 있었다. 몸이 뒤집힌 채 어항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창조를 보고 깜짝 놀랐다가 약간 소름이 끼쳤다가 슬펐다가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가 다시 소름이 끼쳤다가 건져냈다. 물을 조금 부은 스테인리스 볼에 창조를 옮기고 밥주걱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꽃집에 가서 명찰 하나를 얻고 정연이를 기다리며 묘비명을 작성했다. 2009년 2월 1일부터 2009년 4월 10일까지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창조라고, 전혜린을 표방한 묘비명을 쓰려다가 장난 같아서 그만두고 그저 이름과 탄생일, 사망일만을 기록했다. 뒤편에는 삼가 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다. 의 명복을 빈다니. 이것도 어쩐지 장난 같아서 미안해졌다.

그런데 정말 불꽃같은 삶이었을까? 생각해봐, 탄생일은 2009년 2월 1일이 아니잖아. 2009년 2월 1일은 내가 창조를 구입한 날이다. 엄연히 생명을, 구입이라니 이상하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분양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이상하다. 어쨌든 분명한 건 창조의 탄생일은 2009년 2월 1일이 아니다. 2008년 2월 1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신이 만물을 창조하는 순간부터 존재했을지도 몰라. 그러므로 불꽃같은 삶이라기보단 그래, 꽤나 억척스럽게 질긴 삶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덜 슬플 것 같았다. 영감님, 영감님은 가실 때가 된 것입니다. 화창한 봄날에 죽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하여 벚꽃나무 아래 묻기로 했다. 지나다니는 길에 참 예쁘게 피었다고 생각한 벚꽃이었다. 오랜만에 손에 흙을 묻히고 돌부리를 치워가며 조심스레 땅을 팠다.

"됐나?" 내가 말했다.

"어. 작잖아." 정연이가 말했다.

"불쌍해." 내가 말했다.

"근데 진짜 죽은 거 맞어?" 김정연.

"죽은 거 아니야?" 나.

"다시 살아나는 거 아니야?" 정연.

"그럼 어떡하지?" 나.

"묻어." 정연 (이렇게 말했는지 안 했는지 확실치 않다)

"죽었을 거야." 말하며 창조 건지는 박총명.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유심히 바라본다. 정연이가 만져본다.

"죽었네." 정연.

"굳었지?" 나.

"응." 김.

"까매졌어." 박.

"어." 김.

"죽으면 까매지나?" 박.

"그런가 봐." 김.


잠시 후 완전히 묻혔다. 동그랗게 흙을 채웠다. 조그만 무덤이 하나 만들어졌다. 묘비를 세우고, 무덤가를 작은 돌로 둘렀다. 마지막으로 작은 벚꽃 가지를 꺾어 무덤 위에 올리고, 정연이도 예쁜 것을 하나 골라 올려주었다.

안녕. 장례식의 멤버가 떠나고 난 뒤 홀로 남은 창조는 살아났을까. 더 죽었을까.

아무튼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건 탐스 슈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루언 전이에 입각하여 나는 다른 슈즈를 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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