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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Oct 16. 2018

사물의 용도

2007, 9

  서울에 도착했는데 호시노의 전화가 불통이었다. 수십 번을 걸어도 똑같은 멜로디만 간헐적으로 반복될 뿐 그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귀를 틀어막고 잠이 든 게 아닐까? 그래, 아마도 그와 나의 소중했던, 아니 여전히 소중한 사각의 요람에 아기처럼 실려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밤마다 뒤척였고, 때문에 곧잘 휴대폰을 꺼놓곤 했으니까. 하지만 분명 신호가 갔다. 휴대폰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낮잠에 방해되지 않도록 진동으로 해두었을 거다. 다시 한번 그의 번호를 눌렀다.

  나는 차가운 철문에 한쪽 볼을 비벼대며 보이지 않는 곳의 미세한 소음에 집중하려 했다. 헛수고였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이곳에 와서 애타게 그를 기다렸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의 마음을 돌리는 결정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가 고단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발등으로 하얀 쪽지 하나가 스르르 떨어진다면 얼마나 감동적일지 생각했다. 단지 애인이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온 여자, 그가 자리에 있건 없건 상관없이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돌아간 여자, 굳게 닫힌 문을 보면서도 잠시나마 그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행복해하는 여자.
  좋다, 나는 곧장 현관에 등을 대고 앉아 가방 안에서 연습장을 꺼냈다. 내 사랑에게. 글쎄, 첫 장은 찢어버렸다. 공기가 차네. 이번 장도 뜯었다. 어디야, 걱정된다. 한 장을 더 뜯었다. 장난해? 찢고 뜯고 여러 장을 넘겼지만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 철커덩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호시노의 옆집이었다. 예닐곱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작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나왔다. 강아지 목에는 알록달록한 목줄이 빛나고 있었다. 강아지는 아이 곁을 뱅뱅 돌다가 갑자기 내게로 달려들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킁킁. 한껏 찡그린 표정의 아이가 목줄을 제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기고는 스파이더맨처럼 벽에 바짝 달라붙어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뗐다. 뒤따라 나온 어른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음에도 아이는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는 닿거나 스치면 안 된다. 아이에게 나는 집 안에 두면 나쁜 냄새가 나는 쓰레기 더미일까. 그러고 보니 호시노의 집을 제외한 다른 집 앞에는 쓰레기봉투가 하나씩 나와 있다. 어느새 나는 쓰레기와 동격이 되어버렸다.

  몇 번의 철컹거림이 더 있었다. 2년 넘게 이 집을 드나들었지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오늘을 위해 침잠의 무게와 싸워왔다는 듯 좀비처럼 하나둘씩 기어 나왔다.  
  빌라 밖으로 나왔다. 최소한 나는 다섯 시간은 그곳에서 버틸 작정이었다.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를 향한 마음이 절절한 사랑으로 전달되리라.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바깥이라는 트인 공간이 얼마나 기다림에 치명적인지 실감하게 됐다.
  출입문 앞 녹슨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이, 초면의 얼굴들이 내 곁을 스쳐갔다. 그러나 30분이나 한 시간쯤 흐르고 나면 초면의 얼굴은 구면이 되어 되돌아왔고, 얼떨결에 구면이 된 우리는 서로를 못 본체 하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타인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중 몇은 반복적인 마주침에 의해 혹은 무의식에 의해 서로의 기억 속에 각인되기도 한다. 단순한 ‘각인’ 외에 아무것도 공유할 수 없는 경우, 서로는 서로를 어색하게 여길 수밖에 없고, 어색함은 불편함을 불러오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그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공사 중 팻말 같았다.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사람 같은 사물이라서, 사물 같은 사람이라서 죄송합니다.

  자리이동이 불가피했다. 어색함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열등감도 생겨났다. 예컨대, 사람들은 나를 스쳐지나 어딘가에서 일을 잘 해결하고 다시 내 앞을 스쳐갔다. 물론 일을 잘 해결했다는 것은 나만의 추측이며 열등감의 시초는 아마도 이러한 발상으로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만년 벤치 신세로 전락해버린 나로서는 그들의 모습이 코트 위를 휘젓는 농구선수인 양 화려하게 비쳤다. 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열띤 움직임을 기록할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전화 거는 것을 제외하고― 몇 쿼터고 한 자리에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바람맞은 여자의 회색 냄새까지 낮게 풍기고 있었으니 처량함이 극에 달해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갈 곳이 없고, 날은 저물고 있다.
  호시노에게 또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는다. 불현듯 휴게소에서 잠깐 훑은 잡지의 별책부록이 떠올랐다. 애인이 변심했다는 증거 1. 원거리 연애의 경우, 유일한 연결 수단인 휴대전화를 고장 혹은 분실로 위장하는 방법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만약 이대로 그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나는 정처 없이 서울 거리를 헤매다 허름한 포장마차에 들어가 소주 한 병을 입 안에 들이붓고 풀썩 주저앉아 울어버릴 거다. 그런 내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남자 하나가 관심을 갖고 다가와, 혼자 오셨나요? 주제넘지만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제가 아가씨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따위의 말을 건네겠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울고만 있는 나를 다시 조그만 플라스틱 의자에 앉힐지도 모르겠다. 그러곤 내 어깨에 슬며시 팔을 두르고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이는 것이다. 자, 마셔요, 마시고 잊어요. 이미 나는 모든 경계를 늦출 만큼 제정신이 아닌 데다, 남자가 베푸는 악마적 호의가 그저 뭉클하게만 느껴져 그에게 온갖 사실을 털어놓고 싶어지리라. 실은 저, 애인이 있어요……. 남자는 눈치껏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채근하겠지.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애인은 잘 만났나요? 이쯤 되면 나는 복받치는 서러움을 주체하지 못한 채 목 놓아 울 것만 같다. 아니요, 엉엉, 다른 여자가 생긴 거겠죠? 엉엉엉, 저는 버림받은 여자예요! 남자는 내가 크게 울면 울수록 내심 좋으면서 대단히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지그시 나를 바라볼 테다. 저런, 설마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를 두고 바람피울 엄두가 나겠어요? 나 같으면 절대 못 그럴 것 같은데, 한 번만 더 전화 걸어 봐요, 힘들어요? 제가 걸까요? 휴대폰 이리 줘 봐요. 야, 이 정도면 이 남자 상당한 단수인 거다. 그 말에 흥분한 내가 이렇게 외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됐어요! 다 끝났어요! 저도 눈치가 있다고요, 끝이에요, 끝! 시마이! 나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추썩인다. 남자는 같이 울어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왼쪽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어깨를 감싸던 남자의 손은 서서히 방향을 틀어 긴 머리카락을 헤치고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며 말하리라. 미안해요, 실수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당장 눈앞에서 사라질까요? 남자는 일어서려 한다. 나는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는다. ……앉아 있어요. 다시 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나는 거듭 말한다. 그냥 있어요, 같이 있어줘요, 외로워요. 내 입술이 남자의 입술에 다가간다. 남자는 짐짓 당황한 듯한 기색으로 물러나며, 많이 취했어요, 어서 들어가요, 대신 계산할게요, 하는 것이다. 남자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 일어선다. 여기 얼마죠? 하느작거리는 나를 놔두고 주인 앞으로 가는 남자. 여주인은 앞치마에 손을 슥슥 문지르며 남자를 비껴 테이블로 향한다. 오천 원만 줘요. 술기운임에도 나는 고개를 들어 메뉴판을 흘깃 본다. 제법 훌륭한 필체로 ‘소주 3,000’이라고 적혀있다.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긴다. 빈 소주병이 한 병에서 두병으로 늘어나 있다. 남자는 가판대 위에 오천 원을 올려놓고 다시 다가와 내 허리를 붙잡는다. 그리고 묻는 것이다. 갈 데는 있어요? 나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어쩐다, 근처에 여관이 있어요, 거기라도 가겠어요? 바래다줄게요. 남자는 끝끝내 점잔을 빼고 있다. 내가 먼저 말해버리는 편이 낫겠다. 당신 집으로 가요.

  저벅저벅 주황색 천막을 헤치는 남자에 이끌려 내 몸이 일순 휘청거린다. 순식간에 다가선 주인이 내 몸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찰나 눈이 마주친다. 나는 여주인의 옅은 미소를 읽는다.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의 가치는 주인 여자의 악덕한 상술로 인해 이천 원이나 상승된 셈이다. 오늘 밤 남자는 꾸깃꾸깃한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젊고 아름답고 성병에도 전혀 노출되지 않은 한 여자를 품에 안게 되리라.


  남자는 방에 형광등 대신 작은 촛불을 세웠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한 여자의 얼굴이 언뜻 어른거린다. 나는 침대맡으로 다가가 유카타를 걸친 액자 안의 젊은 여인을 들여다본다. 뭘 보고 있어요? 남자가 걸어오며 묻는다. 여자가 있네요. 남자는 깜짝 놀란다. 사진을 보는 남자의 표정이 골똘해진다. 기억이 안 나요, 모르는 얼굴이에요.

  빤히 나를 바라보던 남자가 말한다. 지금 아는 얼굴은 당신이에요.

  남자와 나는 흐르는 물속에 갇힌 듯 어슬렁어슬렁 서로의 몸을 더듬고 호흡을 나눠 가진다. 그러나 번번이 여자의 환한 얼굴과 맞닥뜨린다. 액자를 등지고도 내 몸은 목석처럼 뻣뻣해진다. 다리에 힘 좀 빼볼래요?   

  남자의 허리가 다시 유연하게 흔들린다. 나는 멍한 눈으로 벽에 번진 그의 그림자를 본다. 그의 몸짓이 물살을 가르는 싱싱한 물고기처럼 우아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본다. 방 전체가 온통 흔들리고 있다. 그림자에 속도가 붙는다. 돌연 뭉개지며 추락하는 그림자 반대편, 위태롭던 촛불도 꺼져버린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 고요하다.

  장면이 전환된다. 남자와 나는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있다. 남자가 냄비 뚜껑을 열자 김이 사방으로 피어오른다. 남자가 냄비의 양 날개를 잡고 접시 쪽으로 기울인다. 냄비를 받치고 있던 책 표지가 조금 드러난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위기의 여자>.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안다.

  다른 장면으로 넘어간다. 남자가 변기 청소를 시작한다. 세면대 위 투명한 컵 속에서 칫솔 하나를 꺼내 변기의 좁은 틈을 쑤시고 있다. 내가 칫솔을 찾는다. 청소를 마친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칫솔을 내게 건넨다.

  또 다른 장면이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다. 잠든 남자는 자신의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장면이 다시 바뀐다. 버려진 의자에 비슥이 기대어 있는 여자.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뭐 하고 있어요!

  호시노였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렇게나 묶은 호시노의 운동화 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와락, 울음이 터졌다.

  어쩐 일이야, 온단 말도 없이. 무슨 일 있어요?

  그는 크게 놀라지도 않고 내 눈 언저리를 훔치며 덤덤히 말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속사포 같은 신경질을 늘어놓았다.

  휴대폰, 수리 맡겼어.

  멀쩡했잖아. 갑자기 왜? 수리를 맡겼으면 꺼져 있어야 정상이죠.

  따지듯이 내가 물었다.
  모르죠, 나도. 일단 들어가자. 차가운 것 좀 봐.
  호시노가 커다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나는 안쓰러워 못 견디겠다는 그의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우리 관계에 아무 이상도 없다는 듯 태연하기만 한데 혼자 의심하고 바보처럼 달려온 느낌이었다. 굴욕스러운 기분마저 든다. 호시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올라간다. 평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잠깐만. 뒤를 졸졸 따르던 내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왜, 또. 호시노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호시노 특유의 말투다.
  뭔가 좀 이상한 거 알죠? 앙칼지게 물었다.
  뭐가, 또. 여전히 호시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한다. 열쇠를 찾는 손길마저 태평스럽게, 허둥대는 모습이라고는 없다. 빨리 들어와. 추워.

  도통 이야기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끝까지 같은 태도로 일관한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추궁을 해봤자 나만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심지어 만에 하나, 나의 추궁을 자신의 청렴결백한 사랑(이라고 주장할 것이다)과 대비시켜 경박스럽다 여긴다면, 더 나아가 이런 나를 더는 신뢰할 수 없겠다고 이별을 고한다면 본전도 못 찾는 격이 된다. 침착할 필요가 있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내가 던지고 돌아선 부메랑에 뒤통수를 얻어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호시노가 화장실 간 틈을 타 재빨리 방을 훑었다. 하지만 증거를 찾기 위한 날 선 시선은 어떤 것도 포착해내지 못했다. 변한 것이 없었다. 곳곳에 남아 있는 나의 흔적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아니야, 여자의 직감이란 게 있는데. 그는 분명 내 연락을 피했고 달갑지 않아 했다. 그것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무엇으로 증명하지? 아마도 그는 날 사랑하지 않느냐는 원망 섞인 울부짖음에 ‘아닌데’ 내지는 ‘젠젠’이라는 단답형의 말만을 뱉어낼 것이고 그렇다면 사건은 맥없이 종결될 터였다.

  얼이 빠져 널브러진 나를 호시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수록 피가 거꾸로 솟고 부아가 치밀었다. 침착하게 증거를 찾자는 완벽주의자다운 면모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에 이성이나 목적성이 깃드는 순간, 그 사랑은 이미 색이 바랜 잎과도 같다. 될 대로 돼버려.

  날 사랑하지 않지?

  무슨, 밥이나 먹자.

  역시, 종결이다……. 그는 벌써 싱크대 앞을 서성이고 냉장고 문을 여닫는 중이다. 왜, 라는 의문조차 달지 않았다. 의문이 심문의 시작이라는 걸 간파하고 한 언동이라면 너무나 주도면밀하다. 묻지 않으니 말할 수도 없다. 일방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행위 자체는 내가 의부증(애인을 의심하는 것을 달리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직결될 수도 있다. 절대적으로 불리해진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호시노에 맞춰 침착하게 증거를 찾는 쪽으로 다시 초점을 두자. 잎이 바랬다는 말이 아니다. 이 사랑은 예외다, 새순처럼 싱싱하다, 사랑을 위해 조금은 계획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쾌활하게, 싹싹하게, 애교스럽게, 그렇게 행동하자. 설령 진짜 바람이 났다 해도 나의 싱그러운 모습을 보면 다시 돌아오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나는 포기김치를 썰고 있는 호시노의 뒤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혀 짧은 소리로 이 말 저 말 내뱉는 내 모습이 조금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짧은 대화중에도 시퍼런 칼날이 도마와 마찰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호시노는 금세 김치를 다 썰고,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댕긴다. 공연히 나는 그의 등에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호시노가 차린 식사가 식탁 위에 펼쳐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녀갔을 때 읽었던 책은 테이블 한쪽에 그대로 뒤집혀 있다. 표면이 쭈글쭈글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려나. 그가 내려놓은 냄비 밑에는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한 숟가락을 뜨지 못했다.

  감기 같은데. 호시노가 여러 차례 내 이마를 헛짚는다. 없는 열을 만들어 내기라도 하는 듯이. 이리 와.

  그는 날 일으켜 세워 침대까지 부축해갔다. 자리에 눕히고는 이불을 끌어올려 턱 밑까지 덮어준다. 삐져나온 발을 이불속에 넣어주는 세심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호시노는 유령처럼 바삐 움직였다. 잠이 쏟아진다.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텔레비전 채널이 돌아가는 소리, 나중에 통화해, 라고 말하는 극 중 인물의 목소리, ……아침을 알리는 호시노의 휴대폰 알람 소리가 순차적으로 들려왔다.
  잠에서 깨보니 호시노는 옆에 누워 있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반쯤 뜬 채로 잠을 자고 있다. 아마도 밤새 정리하고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겠지. 약 먹고 자라는 속삭임은 꿈이 아니었을 것이다. 커튼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 그의 얼굴을 투명하게 비춘다. 하루 사이에 자란 거뭇거뭇한 콧수염, 턱 밑에 뾰루지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본 나는 먼저 깨어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씻지도 않고 잠든 탓에 화장은 엉망진창으로 지워지고 눈곱도 잔뜩 끼었다. 입 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하아, 하고 불어보니 고약한 냄새까지 났다. 서둘러 칫솔에 치약을 짰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멈칫, 화장실 문을 박차고 침대로 가보았다. 눈을 꼭 감은 채 잠에 취해 있는 호시노의 곁에 휴대폰은 없었다. 그는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시도조차 없이, 죽은 사람처럼 미동이 없었다. 나는 화장실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흐르는 물에 치약을 고스란히 흘려보냈다. 칫솔을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제자리에 둔 내 칫솔 대신 호시노의 칫솔에 치약을 짰다.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도 호시노는 자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려 드라이기를 꺼냈다. 바닥에 유난히 많은 머리카락이 모였다. 누구의 것인들 구별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재킷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현관에 서서 열 평 남짓의 공간을 빙 둘러보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전주에 도착했는데 호시노의 전화가 결번이었다. 목이 썰렁하네. 바랜 잎이 다 떨어지고 훌쩍 겨울이 온 참이었다. 목을 따스이 감싸줄 머플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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