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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Oct 30. 2018

장난

2009, 5

  조롱을 참을 수가 없다. 조롱은 조롱일 뿐 도무지 장난일 수가 없는 것이다. 뭐라 되받아치지도 못한 사내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그야말로 홍당무가 되었다. 그러자, 그러다 울음이라도 터지겠다며 또다시 조롱한다. 정말로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분하다, 분하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진지하게 조롱했으니 진지하게 분할 수밖에 없다. 기필코 저자에게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더는 조롱할 거리를 만들지 말아야지, 쇠젓가락이라도 씹어 먹을 기세로 이빨을 앙다물고 저쪽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은 채 물컵을 들었다 놨다 몹시 갈증이 나는 척하고 있다. 

  봐라 운다, 진짜 운다, 연거푸 조롱이다. 이제는 물컵에 남은 물도 없어 빈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지고 만다. 몇몇의 적당한 눈치를 받고서야 그자는 장난이었다고 사과한다. 그 자신도 조롱이라는 사실을 버젓이 알고 있으면서 마치 모르는 척, 천진난만하게 장난이라고 둘러대는 꼴을 참을 수가 없다. 그 따위 거짓 사과에 조금쯤은 마음이 누그러드는 나를 더 못 참겠다, 사내는 괴로웠다. 그래 까짓것 봐주자, 이해하자, 용기를 내 힘겹게 미소 띤 눈빛을 마주친 순간 상대는 경박스럽게 웃어재낀다. 역시나 멍청해 보인다는 것이다.  

  조롱이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조롱을 즐기고 있다. 사내는 조금쯤은 누그러진 마음을 곧바로 후회했다. 또 울컥한다.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한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장난이라고 부추기고 있다. 예기치 않게 놀림감이 된 가엾은 사내를 구제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속 좁은 사내를 어서 빨리 화제에서 누락시켜버리고자 함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기지를 발휘하여 재빨리 분위기 전환에 힘썼다.

  사내는 원통했다. 외로웠다. 열흘 전 헤어진 여자 생각이 간절했다. 사랑했던, 즐거웠던, 아아 약간의 방심에도 폭포수처럼 콸콸 울음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해선 안 된다. 스물일곱이나 먹은, 겉보기엔 멀쩡한 남자가, 젓가락질을 하다가 갑자기 엉엉 울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사내는 눈을 부릅뜨며 방출 위기에 놓인 눈물을 가까스로 지켜냈다.

  먼저 사내는 저자가 왜 자신을 조롱했는가에 대한 근원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어수룩해 보였겠지. 나 정도면 식은 죽 먹기다, 라는 계산이 나왔기에 쉽게 조롱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 억울해지고 말았다. 무슨 근거란 말인가. 순전히 저자의 기준으로 사내는 보나 마나 패자였다. 어째서 내가 패자인가, 있는 힘을 다해서라도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리라 사내는 별렀다.

  어수룩해 보이기로는 그자도 마찬가지였다. 와이셔츠 차림에, 머리 모양이 이발소에서 갓 다듬은 티가 나는 것이 누가 봐도 지당한 중년이었으나 찬찬히 뜯어보면 턱 끝이 짧고 얼굴이 작아 앳된 인상을 풍겼다. 게다가 미간이 멀고 코도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개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얼굴을 눈앞에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어도 도무지 외워질 것 같지가 않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낮은 코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안경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랄까. 그러니 외모적으로만 따지면 사내보다 그자가 훨씬 어수룩해 보였다. 다만 그자는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모양으로, 말이나 행동에서 어수룩함을 씻어보고자 필사적으로 남을 조롱하는 듯하였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남을 이용하다니 괘씸하고 비굴한 자식, 내 혼쭐을 내줄 테다. 

  결투에 앞서 모든 면에서 사내는 그자를 능가했다. 젊었고, 키가 컸고, 소주잔을 그러쥔 그자의 손을 몰래 훔쳐본 결과 주먹도 사내 것이 훨씬 컸다.

  일단 걸리기만 해 봐라. 사내는 술도 받지 않고 익어가는 고기를 뒤집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콩나물만 깨작일 뿐이었다. 모든 게 연기였다. 사내는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아직도 삐쳤어. 예의 그 상스러운 웃음과 함께 상대가 걸려들었다. 일분일초도 지체하지 않고 젓가락을 힘껏 던졌다. 물론 허공에였다. 벽에 탁 맞고 튕겨 올라갔다.

  따라 나와. (야호!)

  사내는 비정하게 명령한 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사내의 자리가 출구 반대편 가장 끝이었으므로 걸음걸이에 더 신경을 썼다.

  사내는 그자가 나오자마자 정강이를 걷어찰 작정으로 운동화 끝을 바닥에 툭툭 쳐보았다. 그러다 자칫 치사해 보일 우려가 있어 선제공격하는 일은 관두기로 했다. 이미 젓가락에 정신이 번쩍 났을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조롱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젓가락을 팽개치는 행위는 웬만한 광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사내가 한 수 위다. 그자가 자기 방어로 조롱을 택했다면 나는 광기다, 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 지었다.

  사내는 광인 표정에 자신이 있었다. 단지 상대를 노려보거나 험상궂은 얼굴을 하는 것으론 모자란다. 그것은 정상적이다. 광인은 반드시 웃겨야 한다. 우스운 얼굴일수록 효과는 극대화된다. 따라서 안면근육을 얼마만큼 과장되게 일그러뜨리느냐가 관건이다. 고개를 치켜들고 정신없이 입을 크게 벌렸다 다물었다 하면 슬슬 채비는 된 셈이다. 그 상태로 상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가까이 점점 다가간다. 상대의 얼굴과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다가섰다면, 젖은 몸을 털어내는 짐승처럼 포효하듯 온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면 상대는 웃긴 표정을 보고도 무서워 벌벌 떨게 되는 것이다. 대개는 뭐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하며 물러난다. 싸울 가치도 없다는 듯 말이다. 사내는 한마디로 똥이 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피하게 하고, 자신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다.

  유리벽에 기대선 사내는 담배를 피웠다. 뭘 그리 꾸물대는지 그자는 나올 생각을 않는다. 아마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역시 조롱보다야 광기지 귀여운 자식, 사내에게 이제 앙금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진작 그자를 용서했다. 그자가 겁에 질려 사과하면 후훗 장난이었어, 라고 가볍게 웃어넘기는 아량을 베풀 참이었다. 

  담배 한 대가 전부 타들어갔다. 그런데도 나오질 않는다. 쩨쩨하게 안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바닥에 짓이긴 담배꽁초만 벌써 일곱 개였다. 담배도 동이 났고 사내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따라 나오라고는 했지만 응하지 않는다면 그만 아닌가. 설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안에서는 술잔이 오고 가는 것 아닐까. 사내는 차마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는 다시 기어들어가 안 나오냐 재촉하기도 민망할 만큼 시간이 경과해버렸다. 더구나 재삼재사 결투 의사를 전달할 시, 그때는 광인이고 뭐고 필히 싸워야 했다. 광인이라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돌격했어야 마땅하거늘 이제 다 틀려먹었다.

  사내는 추위와 배고픔보다는 자신의 공백 따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이 잔인하고도 씁쓸한 굴욕 앞에 완전히 넋이 나갔다. 맞은편에 숨어 사람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하나둘씩 이를 쑤시며 나오더니 동그랗게 뭉쳤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두리번거리는 이 하나 없었다.

  사내가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사내가 앉았던 자리에는 회비 만원이 고스란히 반납되어 있었다. 어쩜.

  사무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옛사랑을 떠올린 사내는, 이런 지질한 놈, 나 같아도 도망이다,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았다. 사내는 급히 이어폰을 끼고 시디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음악이 좋아서 우는 거다. 하도 좋아서. 때마침 언니네 이발관의 ‘울면서 달리기’가 재생 중이었으므로 사내는 열심히 달렸다. 열심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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