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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Nov 08. 2018

김의 말로

2009, 5

  웬일로 김은 일찍 일어났다. 일찍이라 해봤자 오전 8시 6분이 고작이었으나 뼛속까지 야행성인 김의 최근 기상시간과 비교해 보면 대단히, 그것도 대단히 대단히 일찍인 셈이었다. 실제로 김이 뼛속까지 야행성인지는 조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본인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 일단은 믿어주는 수밖에. 그러나 ‘뼛속까지’를 매우 강조한 말투로 보면 불규칙한 생활을 정당화하려는 몸부림일 뿐으로,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

  김은 며칠 전 술집에서 장만한 턴테이블에 하나뿐인 레코드를 걸었다. 턴테이블 살 때 주인에게 얻은 것이었다. 원래 있던 오디오가 어쩌다 전선 피복이 벗겨졌는지, 좌우지간 살짝 찢어졌는데 김이 찬을 꺼내려 냉장고로 다가간 순간 빵! 소리를 내며 터져버렸다. 오디오는 냉장고 옆에 있었다.

  김은 기겁하여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일분쯤 그러고 있다가 겨우 진정하고 전원코드를 뽑았다. 다행히 불은 나지 않았다. 김은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듯 위생장갑을 끼고는 오디오를 바깥에 내다 버렸다. 집에 돌아오니 생각났다, 시디가 그대로 들어있었던 것이다. 다시 나가보니 벌써 누가 가져가 버렸다. 빠르다. 마치 김이 오디오를 내다 버릴 줄 알았다는 듯이 여유롭게 잠복하고 있다가, 내다 버려지자마자, 자 오늘은 철수, 하며 쏜살같이 돌아가 버린 듯하다.

  덕분에 텔레비전도, 여자도, 자식도 없는 김의 단칸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글쓰기에 안성맞춤인 걸, 좋아 오늘부터 집필이다, 김은 다짐했다. 허나 39년 인생을 충동과 거짓으로 일관해온 김에게 다짐이란 갯벌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일만큼 무가치한 것, 김은 결코 침묵을 벗 삼아 글 쓰지 않았다. 아니 무엇을 벗 삼던 지간에 쓰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음악이 없어 도저히 안 써진다는 핑계를 대고 술집 주인에게 억지를 부려 지금의 턴테이블을 사고 만 것이다.

  사실 김은 턴테이블이 뭔지도 몰랐다.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꽤나 높은 곳에 달린 선반을 보게 되었는데 그 위에 턴테이블이 있었다. 김은 처음에 금고인 줄로 알았다. 저런 곳에 돈을 놔두다니, 훔쳐버릴까? 오디오라도 하나 사게, 생각했던 김이었다. 마침 그날은 손님도 김뿐인 데다 주인도 꾸벅꾸벅 졸고 있어 충동적으로 턴테이블에 손을 댔다. 거침없이 식탁 위에 의자를 쌓아 올리고 마지막에 쌓은 의자 위로 가볍게 점프한 김이 순식간에 턴테이블을 꺼내 바닥으로 착지한 순간, 주인이 깼다.

  “하하, 왜 이런 곳에다 귀한 걸.”

  김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멋지게 생겼지요? 20년도 더 된 고물입니다만 작동은 합니다.”

  다가온 주인이 친절하게 답했다.

  “작동이라면…….”

  금고가 아닌 것을 눈치챈 김이 얼버무렸다.

  “아직은 쓸 만하다는 거죠. 이왕 꺼낸 거, 오랜만에 좋은 곡 한 번 들어봅시다. 잠깐 기다리세요.”

  주인이 등을 돌려 반대편으로 갔다. 마구잡이로 쌓인 판 더미 사이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뭐 듣기 좋은 거라도 있습니까?” 멀찌감치서 김이 물었다. 김은 이미 사태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찾았습니다.” 먼지 쌓인 LP 한 장을 훌훌 불면서 주인이 돌아왔다. “차벨라 바르가스Chavela Vargas라고…….”

  잠시 지잉, 지잉 하더니 서부영화에 어울림직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주인이 물었다.

  “듣기 좋군요.” 진심이었다. “누구라고요?”

  “차벨라 바르가스.” 주인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남잡니까?”

  “아뇨. 저도 처음엔 남잔 줄 알았죠.”

  “아아…….”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오갔다. 여전히 음악은 흐르고 있었다.

  “파십시오.”

  김이 다짜고짜 말했다.

  “네?”

  “팔 생각 없으십니까? 실은 듣던 오디오가 고장 나는 바람에. 글 쓰는 데 집중이 영 안 되고 있습니다.”

  “거, 안 됐군요. 그나저나 예술 계통에 종사하실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역시. 저도 한때 음악에 몸담았던 적이 있는 지라 창작의 고통을 잘 알죠. 실례가 안 된다면 책 제목을 여쭈어도 될는지.”

  “아직은 없습니다만.”

  “아, 곧 출판을?”

  “아뇨. 그것도 불분명합니다.”

  “아, 이거 결례를.”

  “전혀. 꼭 책이 출판되어야만 한다는 법 있습디까? 책이야 원하기만 하면 사비로도 얼마든지 출판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는 그러한 출판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대형서점에 가보십시오. 좋은 책들만 나와도 모자랄 판인데, 고작 자기만족에 우후죽순 출판되는 책들은 누굴 위해 진열되어 있는지 참. 좋은 책들 사이에선 뭘 집어도 좋은 책이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좋은 책을 고르기가 여간 쉽지 않은 현실이지요. 표지만 화려해지니 원. 여기저기 퇴짜 맞고 제 주머니 파먹기로 출판한 주제에 다른 사람이 직업을 물으면 나, 작가입니다 하고 당당히 밝히겠지요. 제가 다 얼굴이 붉어집니다.”

  김이 되는대로 지껄였다. 고백하자면 사비로라도 제 책 한 권 갖고 싶은 맘 간절한 김이었으나 돈도 글도 없었다. 실은 글 하나가 있긴 했다. 김이 열아홉 일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에 원고지 20매 분량의 콩트 한 편을 썼다. 그걸 아무런 사심 없이 작문 선생님에게 보여주었는데 선생의 반응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 후로 김은 자신의 재능에 그야말로 도취되어 대학에도 진학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으면서 ‘대작을 쓸 것입니다’라는 붓글씨 한 장만을 집에 남긴 채 절간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십여 년 절에서 생활하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못된 손버릇밖에 없었다. 승복과 바랑, 목탁을 훔쳐다가 탁발순례를 하고 순례가 끝나면 전부 버렸다. 김은 장 주네Jean Genet를 우상으로 삼았다.

  불사에서 내려와 도시에서의 생활, 여전히 대기만성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대기만성은커녕 편두통만 만성으로 발전될 뿐이었다.

  “아, 선생은 진정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작가심이 틀림없습니다. 그럼 작업하신 글들은…….”

  “지인 몇몇에게만 복사해서 보여주고 있지요. 여기저기서 출판하라고 난리입니다만 저는 영 내키지가 않아서……. 저는 어디 가서 작가라고 안 합니다. 무직이라고 해버리지. 그럼 사람들은 무시를 하거든요. 작가라 밝히면 곧장 선생 소리가 나오는데. 우습지 않습니까? 하하. 익숙합니다. 즐기고 있지요. 으레 잘난 척을 해대거든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저, 제가 선생이라 칭한 건……. 오해 마십시오. 선생이 뭐가 됐든 지간에 대인배로서의 무언가가 느껴지거든요. 실은 선생과 대화하며 줄곧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래가 성사됐다고 봐도 좋을는지.”

  “아아, 그것만은 좀 곤란합니다.”

  “팔게 되실 텐데요. 장담합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실직고하자면 훔치려고 했습니다.”

  “네? 훔치다니. 선생님 농담도 참.”

  “농담이 아니라니까요. 안 파시면 훔칠 겁니다.”

  주인은 당황했으나 침착했다. 김의 태도에는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단호하고 위풍당당했다. 갑자기 팔아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생겨버린 주인이었다.

  “흠, 그렇다면, 제가 끝까지 고집을 피우면…….”

  “돈도 잃고, (턱 끝으로 턴테이블을 가리키며) 이것(아직 명칭을 모른다)도 잃게 되겠지요.”  

  “팔게 되면 비록 턴테이블은 내 곁을 떠나지만…….”

  “돈도 벌고, 무엇보다 댁과 나 사이에 턴테이블을 통한(이제 안다) 애정전이愛情轉移가 이루어지죠. 떠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애정전이라뇨?”

  “으음. 말씀드리죠. 저는 중고품 거래의 미덕이 애정전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건을 판다는 것은 더 이상 그 물건이 본인에게 쓸모없다는 뜻이겠지요. 주인댁만 하더라도 이 근사한 턴테이블을 선반 꼭대기에 장식용으로 두지 않았습니까. 단언하기 조심스럽지만 감히 단언합니다. 댁은 이미 이 물건에 마음이 떠났습니다. 단지 이 물건을 처음 가졌을 때의 애정과 추억을 떠올리며 지금도 그러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지요. 저는 이 물건을 필요로 합니다.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났단 말입니다. 오죽하면 훔칠 생각까지 하겠습니까. 댁의 애정이 제게로 전이된 것이지요. 참으로 멋진 일 아닙니까? 단순히 사고파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에요. 마음입니다.”

  그날따라 김의 입에서 평소보다 술술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기꺼이. 기꺼이.” 주인은 진심으로 감동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김은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지폐를 전부 꺼냈다. 칠만 원 가량 되었다.

  “전 재산입니다. 염치없지만 오늘 마신 술값이랑 지난번 외상값까지 같이 계산합시다.”

  정말 다 줄 작정으로 김이 주인 앞에 내놓았다. 십 원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전부 주시면 어쩌려고요. 조금은 남겨두십시오. 제가 미안합니다.”

  주인은 지폐 몇 장을 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김은 다시 주인에게 쥐어주었다.

  “제 꿈이 한량입니다. 그런데 돈도 없고 잘 놀지도 못하지요. 더 많이 쥐어드리고 싶지만……. 그러니 이거라도 전부 받아주십시오. 흉내라도 내보게요.”

  주인의 감수성은 어찌나 풍부한지 어느새 눈가에 촉촉이 이슬이 맺혀있었다. 주인은 일어서는 김의 양손을 붙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았다.

  “가보겠습니다.” 김은 손을 뿌리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잠시만!” 주인이 따라 나오며 레코드를 건넸다. “기계만 있어서야 무용지물 아닙니까.”

  그리하여 바르가스만 주야장천 듣고 있는 것이다. 턴테이블의 외관 상태가 썩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세월의 흔적을 타고 있는 듯하여 운치가 느껴졌고, 고맙게도 재생하는 데엔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김이 주인에게 아무렇게나 둘러댄 애정전이가 뜻밖에 김에게 이루어지는 듯하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침햇살과 조우한 김은 무척이나 흐뭇한 기분이었다. 단지 오전 8시 6분에 일어났을 뿐인데 김은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했다고 확신했다.


  배가 고팠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김은 오전 열한 시쯤 성당에 당도했다.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김이 가끔 끼니를 해결하거나 돈이 필요할 때 찾는 곳이었다. 김은 성당이 주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신뢰했다. 건축물, 미사, 성호를 긋는 일, 머리에 뒤집어쓰는 면사포 같은 천조각 등 성당과 관련한 것은 전부 아름다웠다. 처음엔 단순히 돈을 훔치러 간 것이었지만 성당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후로는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한갓 회개로 범죄를 묵인한다는 것은 김의 상식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으나 회개를 통해 김은 조금은 안심하고 다음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 그러나 김은 스스로의 위법을 범죄라 규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 조금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뿐이다, 라고 생각할 따름으로 죄책감도 없었다. 장 주네를 우상으로 삼은 김이었지만 정말로 큰 범죄를 저질러 복역하게 되면 큰일이었다. 감옥에서 좋은 글을 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도둑질은 어디까지나 문방구에서 공책을 훔치거나 슈퍼에서 빵을 훔치는 것, 혹은 약국에서 칫솔이나 입술 보호제를 훔치는 것 등 애들 장난 수준에 머물러야 했다.

  신부는 헌금을 가로채는 김을 막기 위해 김이 성당을 찾을 때마다 복사服事를 통해 얇은 봉투를 건넸다. 김은 그 돈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생계라고 해봤자 술이 전부였지만 술이면 됐다. 그간 부쩍 과음했다. 가지고 있던 돈은 먹고 마시는 데 전부 탕진해버리고 그나마 있던 돈마저 턴테이블 사는 데 날려버렸다. 파산이었다. 그러나 김은 신이 났다. 완벽하게 파산이었으므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은 이제부터 신부가 주는 돈을 음주에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을 작정이었다. 보통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면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 돈을 모아보려 할 테지만 김은 신부의 원조援助를 방탕하게 쓰지 않으리라는 다짐만으로 뿌듯해하는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김은 신부에게 밥을 얻어먹고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오후 한시쯤이었다.

  김이 성당 근처의 만화방에서 쥐새끼처럼 이토 준지를 독파하고 나왔을 땐 어느덧 일곱 시가 넘어있었다. 김은 뉘엿해져 가는 태양을 바라보다 문득 못 견디게 외로워졌다. 이렇게도 살아지는 생, 허망한 삶이다. 단돈 십 원 없이도 살아지는 삶, 부끄러운 생이다.

  맞다, 나 돈 있어. 김은 복사가 건네준 봉투를 열어보았다. 4,000원이 들어있었다.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럴 바에야 훔치는 게 훨씬 이득이다. 어쩐지 부랑자 취급을 받는 기분이다. 당장 소주 세 병을 사자 사백 원이 남았다. 새우깡을 사려했지만 잔돈이 모자랐다. 그 사백 원마저 소주 뚜껑을 열다가 떨어뜨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슈퍼 주인이 오십 원짜리 하나와 십 원짜리 다섯 개를 거슬러주는 바람에 아홉 개의 동전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라이 다 가져가라! 다 삼켜버려라!” 주위의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버럭 외치며 벌컥벌컥 소주 한 병을 들이붓는 김이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까 봉투를 건네준 복사가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어이, 꼬마. 거기 서봐.”

  소년이 돌아봤다.

  “웬 우산이냐. 비도 안 오잖아!” 김이 소년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온다고 했어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이 말했다.

  “비가 오면 오는 거지, 떨기는 왜 떨어? 봉투 열어봤지?”

  소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우산 펼쳐봐.”

  소년이 펼쳤다.

  “거 봐, 열어봤지?”  

  소년은 좀 전보다 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왜 우산이 새 거냐?” 대체 무슨 생각으로 따지고 있는 건지 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우산 샀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줄게.”

  “진짜 안 열어봤어요.”

  “너 그러고도 신부 될 수 있을 것 같냐. 이건 내가 가져간다. 내 돈이었잖아.” 김이 우산을 낚아채며 비틀거렸다. 지팡이로 딱이구만.

  김은 방향을 틀었다. 날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김은 눈을 감고 우산으로 바닥을 탁탁 쳐내려 갔다. 나는 장님이다, 장님이다를 되뇌며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는 기분이 이상하게 상쾌했다.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감촉과 만발한 아카시아의 나른한 향기, 아슬아슬하게 김을 지나쳐가는 자전거의 짤랑거리는 알림 소리 등 시각을 제외한 온몸의 감각이 외롭던 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눈만 감으면 된다, 눈만 감으면.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눈을 감고도 이토록 사물이나 감각의 윤곽을 선명하게 구현해낼 수 있다면 장님이 되어도 좋으리, 김은 앞으로 앞으로, 느릿느릿 그러나 올곧게 뻗어나갔다. 그의 몸은 마치 선천적으로 맹인이었던 것처럼 길가의 불균형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김이 소주 한 병을 더 깠다. 술을 털어 넣기 위해 고개를 젖혔을 때 김의 이마 위로 굵은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소년의 기상예보가 아니었대도, 이마 위의 빗방울이 아니었대도, 김은 비를 예감하고 있었다. 깊어진 바람의 냄새에서, 달라진 사람들의 발소리에서, 꼭 감은 두 눈 속을 종횡무진하는 색색의 행렬을 통해서.

  김은 맹인의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인 지팡이 대용 우산을 펼치지 않고 꿋꿋이 땅을 향해 내리꽂았다. 김은 비를 맞으며 뛰다시피 걸었다. 발걸음에 속도감이 붙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김은 속 쓰림과 허기를 동시에 느꼈다. 마지막 남은 소주 한 병을 마저 비우는 김이었다.

  끼익! 하는 굉음과 함께 김은 눈을 떴다.

  “시발, 앞 똑바로 안 보고 다녀?”

  눈 뜬 세상은 이런 식이다. 몸소 실감한 김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다시 떴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김의 젖은 몸이 축 늘어졌다. 속 쓰림은 더욱더 지독해졌다.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김의 발걸음은 길가에 위치한 포장마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김이 포장마차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각자 책 한 권씩을 옆구리에 낀 자그마한 아가씨 둘이 안으로 들어갔다. 김은 아가씨 둘에 가려져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여주인의 눈치를 살금살금 보며 마치 사람을 기다리는 척 은근슬쩍 포장마차 안을 엿보았다. 두어 번 술도 얻어마시고 농도 나눴던 터라 여주인과는 안면이 있었다. 김은 비 맞은 몸을 무기로 삼았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뎅국물 한 컵 정도는 주겠지 싶었던 것이다.

  “우산은 뒀다 국 끓여 먹을라구? 안 들어오고 뭐하쇼?”

  여주인이 김을 발견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친구 놈이랑 술 한 잔 하기로 했는데 이놈이 아직…….”

  “그 짝은 벌써 취한 것 같은데? 들와서 기다리지 않고.”

  “그러잖아도 먼저 취해버려서……. 이놈이 와야 주문을 하든 말든 할 터인데.”

  “그리 추워 벌벌 떨지 말고 이거나 한 그릇 잡숴. 거기 고로코롬 서서 알짱대니 내가 더 신경이 쓰이는구먼.”

  옳거니. 김은 아가씨 둘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국물 한 그릇을 받아마셨다.

  아가씨들은 떡볶이를 먹는 중이었다. 젊은 여자의 음식물 섭취는 이따금 김의 성욕을 자극했다. 김의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해도 선정적인 그림이 펼쳐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김의 욕망은 성욕보다 식욕을 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김 앞의 그녀들은 젊기는 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나는 날씬했지만 못생겼고, 하나는 봐줄만했지만 거대했다. 그러므로 떡볶이를 씹는 그녀들을 보자 김은 식욕 외의 어떤 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두 점만, 제발 한두 점만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그녀들의 입속으로 빨간 떡은 쉴 새 없이 잘도 들어갔다.

  “참 맛깔나게도 드시네.” 김이 비꼬았다. 먹을 수 없다면 시비라도 걸고 싶었던 것이다.

  아가씨들은 먹던 손을 멈추고 김을 흘끗 보았다. 거대한 여자가 빨리 먹고 나가자, 라고 낮게 소곤댔다. 거대한 몸답게 남은 것은 마저 처리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돼지야, 천천히 먹어. 그렇게 맛있냐?” 김은 ‘돼’에 악센트를 붙여 발음했다. ‘돼지’는 기분이 나쁜 듯 김을 노려보았다.

  “술 많이 취했네.” 여주인이 중재하듯 나섰다.

  “나가자.” 못생긴 여자가 말했다.

  “우리가 왜? 뭐 잘못했어? 신경 쓰지 마.” 거대한 여자가 맞받았다. 남은 떡볶이를 사수하려는 노력이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돼지야, 나도 하나 먹자.” 김은 어떻게든 저 돼지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떡볶이를 빼앗고 싶어서 이쑤시개를 들이밀었다.

  돼지가 김의 손을 탁 소리 나게 치며 저지했다. 김은 솔직히 놀랐다. 약간 두려워졌다.

  “아줌마, 여기 얼마예요.”

  “어, 자기들 떡볶이 1인분이랑 튀김? 3천 원.”

  “여기요.” 돼지는 5천 원짜리를 내밀었다. “저 아저씨 1인분 줘요.” 그러고는 내려뒀던 책을 다시 옆구리에 끼고서 유유히 나가는 것이다.

  “인심도 후덕하네.” 여주인은 떡볶이 1인분을 김 앞에 내려놓았다. “어이구, 양반아. 드셔.”

  “아니, 근데 이년들이! 누굴 거지로 알아!” 김은 재빨리 떡 몇 점을 입에 넣고 비에 젖어 허벅지에 척 달라붙은 바지 주머니를 들쑤셨다. “이게 왜 이렇게 안 나와. 이 여편네야! 너두 기다려.”

  김은 멀어져 가는 두 여자의 뒷모습을 단번에 알아보고 뛰었다.

  “야! 니들 거기 서!”

  돼지와 추녀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돼지 같은 게! 못생긴 주제에! 책은 왜 옆구리에 하나씩 끼구! 죽어! 죽어!”

  김은 두 여자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강타했다. 머릿속으로는 떠오르지 않는 문장을, 이미지를, 필명을, 장 주네를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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